인공지능(AI) 붐에 힘입어 칩 제조사, 클라우드 기업, 빅테크 주식으로 투자자가 몰리고 있지만, 더 확실하고 장기적인 기회는 수요가 급증하는 전력 시스템에 있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 자산운용사 TCW그룹의 진단이다.
TCW의 주식 포트폴리오 매니저 엘리 호턴(사진)은 투자자들이 에너지 인프라를 단순히 데이터 센터 투자의 부수적인 결과물로만 취급한다면 지나치게 좁은 시각으로 시장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호턴 매니저는 최근 한국경제신문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투자자가 갖는 인식의 오류는 전력 인프라를 단순히 AI 자본 지출(CAPEX)의 파생물로만 여기는 것"이라며, "실제로 AI는 현재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세 가지 강력한 수요 동인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호턴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미국의 전력 수요는 사실상 정체 상태였다. 하지만 향후 수년간은 연간 2~3%씩 성장할 것으로 TCW는 보고 있다.
이 같은 성장은 AI 데이터 센터뿐 아니라 제조업 리쇼어링, 운송·제조 부문의 전기화, 수년간의 교체 투자가 시급한 노후 전력망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호턴 매니저는 AI 데이터 센터 하나만으로도 2030년까지 미국의 전력 수요가 80~130기가와트(GW)가량 늘어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반도체·과학법(칩스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지원을 받아 추진 중인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의 미국 내 온쇼어링(국내 생산 전환) 수요까지 더해지면 데이터 센터 못지않은 거대한 수요가 더해진다.
그는 "설령 AI 자본지출이 내일 당장 절반으로 줄어든다 해도, 미국은 여전히 지난 40년래 가장 거대한 전력 수요 증가 충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우리의 투자 전략은 글로벌 에너지 시스템이 일시적인 경기 순환이 아닌, 구조적인 대전환을 겪고 있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수립됐다"고 밝혔다.
◆전력망 병목 현상
이 인프라 투자론의 출발점은 준비돼 있지 않은 미국의 전력망이다. 호턴 매니저는 전력 공급의 병목 현상이 단순히 발전 단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짚었다. 변압기, 변전소, 송전선, 개폐장치, 차단기, 보호 계전기, 전력망 소프트웨어, 그리고 숙련된 노동력에 이르기까지 전력 공급망 전체가 병목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제약은 기업들의 수주 잔고와 납품 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호턴에 따르면 대형 전력 변압기 주문부터 인도까지 걸리는 시간(리드 타임)은 기존 약 50주에서 현재 120주 이상으로 대폭 늘어났다.
현재 미국 내 자체 제조 역량으로는 미국 내 변압기 수요의 약 20%만 충당할 수 있는 실정이다. 기저부하를 책임질 대형 가스 터빈의 생산 슬롯 역시 GE버노바, 지멘스에너지, 미쓰비시 등 글로벌 일류 제조사 전반에 걸쳐 사실상 2020년대 말까지 예약이 모두 마감된 상태다.
호턴 매니저는 "지금은 어떤 병목이 가장 심각한지 따질 때가 아니라, 전력 시스템 전체가 동시에 제약을 받고 있으며 결국 이 병목을 해결해 주는 기업으로 자본이 흘러 들어갈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이 이 인프라 사이클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그리고 일부 기업들이 얼마나 강력한 영업 레버리지 효과를 낼 수 있을지를 여전히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TCW는 이미 시장에 잘 알려진 대형 전기 장비 제조업체뿐만 아니라, 틈새 장비 제조사, 지역 엔지니어링 기업, 산업 자동화 업체, 그리고 전력 반도체 기업 등 아직 시장에서 제대로 발굴되지 않은 공급업체 전반에서 큰 기회가 올 것으로 보고 있다.
◆데이터센터 과잉 투자 위험은 없나
물론 기업의 AI 채택 속도나 비즈니스 수익화가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일부 데이터센터 프로젝트가 지연되거나 가동률이 떨어지고 단가 재조정이 일어날 위험은 있다.
호턴 매니저 역시 유의미한 수준의 과잉 투자가 발생할 경우 단기적인 시장 불확실성은 커질 수 있다고 봤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전력망 인프라의 성장 스토리가 훼손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미 미국의 송전 시스템 자체가 극도로 노후화돼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 송전 인프라의 약 70%는 설치된 지 25년이 넘었다. 호턴은 "새로운 데이터 센터가 단 하나도 들어서지 않는다고 가정하더라도, 이 노후 시설을 교체하는 수요만으로 변압기, 전선, 개폐장치 제조사, 엔지니어링 기업은 향후 10년 이상 먹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며 "데이터 센터는 전력 수요를 폭발시키는 기폭제일 뿐, 전력망 투자 스토리의 전부가 아니다"라고 했다.
◆TCW의 관련 ETF
TCW는 이같은 인프라 투자 테마를 반영해 'TCW 트랜스폼 시스템즈 ETF(PWRD)'를 출시했다고 밝혔다. 이 ETF는 AI, 전기화, 그리고 에너지 안보의 이면에 자리 잡은 물리적 인프라 전반에 투자하도록 설계됐다. 투자 대상은 발전, 송배전 인프라, 전력망 부품, 천연가스, LNG, 자동화 공정, 전력 반도체, 전력망 현대화 기술 관련 기업을 망라한다. 이 ETF는 철저히 집중 투자 방식을 채택해 통상 20~30개 내외의 기업만을 편입하며, 3~5년의 장기적인 관점에서 액티브하게 운용된다.
호턴 매니저는 "우리는 단순히 에너지라는 테마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테마 안에서 가장 확실한 확신을 주는 핵심 기업을 선별해 보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 ETF는 에너지 전환을 바라보는 TCW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고 호턴 매니저는 자평했다. 탄소 감축도 중요하지만, 글로벌 에너지 투자에서 '전력 공급의 안정성'과 '안보'가 다시 핵심 화두로 부상함에 따라 천연가스, 태양광, 원자력 모두가 각자의 명확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최근 TCW가 벤처글로벌, 셰니에르 에너지 등 미국 LNG 수출 기업에 대한 노출을 확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정학적 리스크로 에너지 안보가 정책 의제의 중심으로 복귀한 상황에서, 글로벌 바이어들에게 북미산 천연가스의 가치는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물론 전력 인프라 주식이 이미 가파른 랠리를 펼친 만큼, 지금 진입하기에는 밸류에이션부담이 크다는 우려도 있다. 실제로 높아진 주식 가치, 정책 집행 지연, 금리 민감도, 데이터센터 과잉 투자 가능성 등은 향후 투자 수익률을 제약할 수 있는 리스크 요인이다.
하지만 호턴 매니저는 전력 인프라 투자가 AI 수요 하나에만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전기화, 에너지 안보, AI, 그리고 탈탄소화라는 네 가지 메가 트렌드가 지금 정확히 같은 시기에, 같은 방향으로 시장을 강하게 견인하고 있습니다."
서수경 한경글로벌뉴스 기자
◆TCW그룹은
1971년에 설립됐다. LA에 본사를 둔 글로벌 자산운용사로, 2025년말 기준 총 운용 자산(AUM)은 약 2060억 달러(약 280조 원 이상)에 달한다. 전체 자산의 약 80%를 차지하는 채권 운용으로 유명하지만, 주식과 신흥국 채권 투자, 대체 크레딧 전략도 활발하다. 최근에는 AI, 공급망 리쇼어링, 에너지 전환 인프라 등 구조적 변화에 맞춘 다양한 테마형 상품을 시장에 선보이고 있다.

2 week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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