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안다고 생각했던 ‘가족’, 그 안에 갇힌 오해와 갈등
벽을 넘어서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개인들
이해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서로에게 내뱉는 상처의 언어와 거짓말. 영화 ‘언니 유정’은 ‘영아 유기’라는 민감한 소재보다는 ‘가족’이라는 가장 내밀한 사이에서도 소통하지 못한 데서 발생하는 갈등과, 그럼에도 서로의 진심을 향해 나아가는 화해에 집중한다.
엄마가 죽은 후 동생 ‘기정’(이하은)을 돌보며 실질적 가장으로 살아온 ‘유정’(박예영)은 나이트 근무 간호사로 일한다. 어느 날 동생이 학교 내 ‘영아 유기’ 사건의 범인이라는 연락을 받은 유정은 입을 닫은 동생 대신 홀로 고군분투한다. 진짜 동생이 벌인 일인지, 그렇다면 왜 그랬는지 이해해 보려 하지만, 기정의 친구인 ‘희진’(김이경)을 만난 유정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동생의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기 시작한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CGV상을 수상하며 일찌감치 수작으로 손꼽혀온 영화 ‘언니 유정’은 고등학교 내에서 벌어진 영아 유기 사건의 당사자임을 고백한 기정과,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언니 유정이 겪게 되는 딜레마를 담고 있다. 독립영화로 활동을 시작,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안나’, ‘세작, 매혹된 자들’로 대중들에 깊은 인상을 남긴 박예영이 주인공 ‘유정’ 역을 맡아 강인함과 유약함 사이를 오가는 캐릭터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었으며, 극의 윤색까지 맡는 열정을 발휘했다.
드라마 ‘모범형사’ 시리즈와 ‘다크홀’, ‘모범택시’, ‘악귀’에 출연하며 성숙한 연기력을 선보여온 이하은이 동생 ‘기정’ 역을 맡아 최소한의 대사와 입체적인 눈빛으로 위태로워 보이는 기정을 연기한다.
영화는 학내 영아 유기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 기정과, 사건과 일 사이에서 여러 가지로 힘겨워하는 유정의 현재, 그리고 친구 희진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기정의 과거를 교차 편집했다. 그러나 기정의 사건에 대한 막후 상황이나 세부적인 내용보다는 대사 사이의 긴 공백, 침묵과 눈빛이 말해주는 캐릭터들의 감정에 집중한다.
눈에 띄는 것은 카메라의 움직임이다. 사건이 심화되면 움직임이 격렬해지고, 반대로 홀로 있는 유정을 비추는 신은 정적이다. 가족과 학교 모두 돌보지 못한 채 방임된 존재, 상처받지 않길 바라지만 생기는 가족 간의 생채기, 여성과 연대, 부족한 의료 인력 등 팍팍한 현실도 조명한다.
감정 기복이 적고, 어릴 때부터 동생을 돌보느라 다소 방어적이 된 듯한 유정은 극이 흘러갈수록 감정의 울렁임이 커지고, 세상과 동생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방법도 달라진다.
‘언니 유정’으로 첫 장편 데뷔한 정해일 감독은 실제 조카의 탄생이 영화의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충만감과 동시에, 미성년자 출산과 영아 유기에 관한 뉴스는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생명의 잉태와 탄생 과정의 ‘무게감’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 감독의 말.
‘언니 유정’은 미스터리라는 장르로 드라마에 대한 몰입도를 선사하는 한편, 가족의 본질이라는 메시지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사건의 인과나 당사자가 누구인지라는 질문에 갇히기보다, 해당 사건을 계기로 ‘소통’이나 ‘관계’에 대해 고민해볼 것. 러닝타임 101분.
[글 최재민 사진 (주)스튜디오 하이파이브, 찬란]
[※ 본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만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60호(24.12.24)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