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 2세들은 아무래도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누구의 자식’이라는 사실은 태어나는 순간 정해진 굴레다. 잘해도 본전, 못하면 부모만 못하다는 얘기 듣기 십상이니까. 이청청은 한국을 대표하는 패션 예술인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디자이너 이상봉의 아들. 올해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패션쇼를 시작한 지 15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를 설명하는 절대적 수식어는 이상봉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저명한 부친을 둔 2세의 부담감을 찾아보기 힘들다. 뚜렷한 족적을 남긴 예술가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이 있지만, 이청청은 별개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 아티스트라는 메타 인지가 확실하다.
“어릴 적부터 패션은 숨 쉬듯 당연한 일상이었죠.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시고, 좋은 교육까지 받게 해 주신 부모님에 깊이 감사하죠. 아버지로부터 패션에 대한 재능을 물려받은 것도 엄청난 행운이고요. 그러나 저는 이청청입니다. 이상봉이 아니죠. 제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이청청만의 패션’을 구축하는 일이 제겐 가장 중요합니다.”- 패션 디자이너 이청청
이상봉으로부터 기인 된 재능, 대를 이어 패션을 가업으로 한다는 정체성은 자신의 출발이기에 부친 브랜드인 Lie sang bong에서 성(性)인 이(Lie)를 따서 라이(LIE)로 붙였다. 또 Life Is an Expression. (인생은 표현이다) 이런 뜻도 담았다. 이상봉 아들이라는 천륜 관계를 아예 전면에 내세우는 건, 역설적으로 누구의 2세지만 선대와는 다른 예술관을 표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다. 이청청은 패션 명문대 영국 세인트 마틴(Central Saint Martins)에서 남성 패션을 공부한 다음 다시 아트&디자인으로 학위를 하나 더 취득했다. 패션 예술가로서 굳건한 토대를 만들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패션은 물론 예술과 디자인 전반까지 공부하게 이끌었다.
그의 패션을 관통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위트. 쇼에 올리는 컨셉과 주제는 매 시즌 달라져도 경쾌하고 발랄한 유머 감각은 반드시 가미한다. 지난 시즌에는 실존하는 네팔 여성 세르파(히말라야 등반 조력자)인 ‘락파’를 페르소나로 내세웠다. 락파는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 10회 등반에 성공한 불세출의 세르파. 불굴의 여성을 주제로 펼쳐진 쇼는 시종일관 위풍당당했지만, 유머 감각도 빠지지 않았다. 쇼의 중간 갑자기 어마어마한 높이의 산악 배당을 멘 모델이 등장한 것. 마치 에베레스트를 상징한 듯, 비현실적인 배낭을 메고도 씩씩하게 걷는 모델은, 쇼의 긴장감을 확 낮추면서 관객들에게 놀라움과 재미를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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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위트는 자연인 이청청에게도 발견할 수 있다. 절도 있는 슈트를 즐겨 입고, 외모도 단정한 그는 처음 보면 패션 디자이너보단 프로 비즈니스맨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대화를 나누면, 말맛이 살아있는 티키타카를 즐기는 장난꾸러기 같은 면모가 물씬하다. 그의 패션은 그런 점에서 그를 많이 닮아있다.
“제 옷을 입는 분들이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패션쇼도 마찬가지죠. 주제나 테마는 심도 있게 담지만, 전달하는 방식은 즐겁게 하고 싶어요. 패션쇼를 준비할 때도 집요하게 고민합니다. 힘을 주는 것보다 빼는 것이 언제나 가장 어렵죠. 진지한 고민과 성찰은 저의 몫이고, 관객들에게는 오직 시각적 감동과 유쾌함만 드리고 싶어요.”- 패션 디자이너 이청청
2025년은 이청청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학업을 마친 영국에서 2010년 런던 패션위크에 데뷔한 지 딱 15주년이다. 2013년 자신의 브랜드 LIE를 출범하고 2014년부터 서울패션위크에서 쇼를 올린 지도 10년을 넘겼다. 15년간 파리, 뉴욕, 런던, 상하이 등 세계 패션의 심장부에서 꾸준하게 쇼를 열면서 국내는 물론 세계 시장에도 노크 중이다.
- 패션 디자이너 이청청
9월 서울패션위크에서 패션쇼를 올리는 이청청은 이번에 LG생활건강과 협업을 한다. ‘런닝’을 주제로 삶을 역동적으로 즐기는 여성에게 어울리는 옷들이 주인공. 이런 여성들은 효과는 확실하되 편의성 높은 제품을 애용하리란 생각으로 LG 프라엘(LG Pra.L) 뷰티 디바이스 신제품을 쇼에 등장시킬 예정이다. 패션은 물론 그에 어울리는 제품까지 제안하는 것. 그는 예술과 산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다. 예술적인 옷은 안 팔린다는 편견도 깨고 싶고, 매우 잘 팔리는 옷이 예술적일 수 있다는 사실도 입증하고 싶다.
“우리의 K-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저변에는 우리 고유의 예술성이 담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K-팝의 선봉장인 BTS는 매우 대중적이면서 예술성도 뛰어납니다. 유일하게 패션만이 아직은 세계적인 K-문화 열풍 속에 소외되어 있는데, 전 제 LIE 브랜드로 세계 무대 도전을 계속하겠습니다.”- 패션 디자이너 이청청이상봉은 그의 이름을 맑을 청(淸), 푸를 청(靑)으로 지었다. 이름대로 맑고 푸른 K-패션의 미래가 되고 싶다는 이청청. 그가 보여줄 청청(淸靑)한 패션이 기대된다.
<이상봉이 보는 이청청>
이상봉은 올해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CFDK) 7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한국 패션 디자이너들을 아우르는 대표 단체의 수장을 맡아 어깨가 무겁다. 이 단체가 2012년 설립될 때 초대 회장을 맡은 이후 13년 만에 다시 회장직을 수락한 터라, 각오도 남다르다. K-패션의 핵심인 한국 패션 디자이너들을 조력하는 일이 그의 당면한 가장 큰 사명. 아들인 동시에 현재 가장 활발한 성과를 보이는 후배 디자이너 가운데 하나인 이청청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할까?
“솔직히 처음에는 디자인에 대해 좀 조언하기도 했는데, 전혀 듣지 않고 본인 의지대로 하더라구요. (웃음) 그 이후 일절 간섭하지 않습니다. 제가 평생의 사명인 ‘한글을 패션 디자인에 예술적으로 승화하는 작업’에 매진하듯, 이청청은 본인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주제를 패션에 투영하는 거죠. 다만 저는 이청청이 좀 더 예술미를 추구했으면 좋겠는데, 본인은 예술과 대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디자이너로서 고집은 우리 둘 다 엄청나니까. 존중하고 응원할 따름이죠.” -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최효안 예술 칼럼니스트·디아젠다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