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전력시스템 대전환기, 독립적 감독체계 구축 서둘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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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준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이병준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전력 시스템은 평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사회 전반을 마비시키는 국가 핵심 인프라다. 전기는 공기처럼 당연하게 공급되지만, 그 이면에는 실시간으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정교한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산업 생산은 물론 통신, 교통, 의료까지 연쇄적으로 멈춘다. 지난해 4월 이베리아 반도 대정전은 이러한 전력 시스템의 취약성과 복잡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였다.

최근 발표된 최종 조사보고서는 사고 원인이 단일 설비 고장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재생에너지의 급격한 출력 변동, 송전망 제약, 계통 운영자의 판단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시스템 전체가 연쇄적으로 붕괴됐다. 특정 기술의 실패라기보다, 다양한 요소를 통합적으로 관리하지 못한 거버넌스의 한계가 사고를 키웠다는 것이 핵심이다. 즉, 전력 시스템의 위기는 더 이상 '설비 문제'가 아니라 '운영과 감독 체계의 문제'로 성격이 바뀌고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구조적 리스크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공지능(AI) 확산과 디지털 전환은 전력 수요를 전례 없이 끌어올리고 있다. 특히 데이터센터와 같은 초대형 전력 소비 시설은 수도권에 집중되며 계통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반면 공급 측면에서는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비중이 늘어나면서 출력의 변동성과 불확실성이 구조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과거처럼 예측 가능한 수요와 안정적인 공급을 전제로 한 운영 방식으로는 대응이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전력계통은 단순한 수급 관리의 영역을 넘어섰다. 초고속으로 변화하는 수요와 공급, 지역 간 송전 제약, 그리고 초단위로 내려지는 운영 판단이 맞물리는 고도의 복합 시스템으로 진화하고 있다. 여기에 전기차 충전, 분산에너지, 에너지저장장치(ESS)까지 더해지면서 계통은 더욱 다층적이고 비선형적인 구조를 띠게 됐다. 작은 변수 하나가 전체 시스템 안정성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복합 리스크 체계'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해야 할 우리 거버넌스는 여전히 과거의 틀에 머물러 있다. 정책은 정부가, 운영은 한국전력과 전력거래소가 담당하는 이원적 구조다. 기능은 분산돼 있지만 리스크는 하나의 계통에 집중된다. 평시에는 문제 없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책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대응은 늦어질 수밖에 없다. 사고 이후 원인 규명과 책임 소재를 둘러싼 혼선이 반복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향후 AI 기반 의사결정이 확대되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운영 효율을 높이고, 수급 균형을 보다 정밀하게 맞출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알고리즘의 판단 과정은 '블랙박스'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특정 판단이 왜 내려졌는지, 그 과정이 적절했는지를 사후적으로 검증하기 어렵다면 새로운 유형의 시스템 리스크가 발생할 수 있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이를 감시하고 검증할 독립적 장치의 필요성은 더 커진다.

전력감독원 신설 시 기관별 역할 구분전력감독원 신설 시 기관별 역할 구분

해외 주요국은 이미 이러한 변화에 맞춰 제도를 재편해 왔다. 영국은 독립 규제기관인 Ofgem을 중심으로 시장과 계통을 감독하고 있으며, 미국은 FERC와 NERC를 통해 신뢰성 기준과 운영 전반을 다층적으로 관리한다. 유럽 역시 ENTSO-E를 중심으로 장기 계통계획과 안정성 평가를 수행하며, 국가 간 협력 기반의 감독 체계를 발전시켜 왔다. 전력 시스템이 복잡해질수록 감독 기능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전력감독원 설립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단순히 조직을 하나 추가하는 방식으로는 실효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정책과 운영으로부터 독립된 법적 지위를 명확히 하고, 계통·시장·전원뿐 아니라 AI 기반 운영까지 검증할 수 있는 전문성을 확보해야 한다. 상시 감시체계를 통해 이상 징후를 조기에 포착하고, 사고 발생 시에는 독립적인 조사와 권고를 수행할 수 있는 권한도 함께 보장돼야 한다.

또한 데이터센터와 같은 대규모 신규 수요, 그리고 송전망 투자와 관련해서도 사전 검증 기능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경제성이나 입지 논리를 넘어, 계통 안정성에 미치는 영향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 이는 특정 사업을 규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리스크를 사전에 관리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에너지 전환과 AI 전환이 동시에 진행되는 지금, 전력계통은 국가 디지털 경제를 떠받치는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다. 산업 경쟁력, 국가 안보, 국민 생활의 안정성이 모두 이 시스템 위에 놓여 있다.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그 기술을 어떤 원칙과 책임 아래에서 통제하고 검증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전력감독원 설립은 새로운 조직을 하나 만드는 문제가 아니다. 복잡해진 전력 시스템을 국가가 어떤 질서와 책임 구조로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선택이다. 더 늦출수록 리스크는 커지고, 대응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에 대한 결단이다. 그 결단을 더 이상 미룰 이유는 없다.

이병준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leeb@korea.ac.kr

〈필자〉전력계통과 전력시장 분야를 연구해온 국내 대표 전문가다. 1990년대 중반부터 고려대에 재직하며 전력계통 운영과 안정성, 재생에너지 통합 등 핵심 연구를 이어왔고, 한국전기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학계와 산업계 전반에서 영향력을 확대해왔다. 현재는 전력망 안정성 확보와 에너지전환 과정의 계통 리스크 대응, 전력시장 구조 개선 등 차세대 전력시스템 구축에 관한 정책 자문과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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