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 K팹리스 1% 벽 깨는 투트랙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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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한국팹리스산업협회장김경호 한국팹리스산업협회장

최근 대한민국 반도체는 '고대역폭메모리(HBM) 독주'라는 성과에 고무돼 있다. 그러나 축배의 잔을 잠시 내려놓고 냉정하게 시장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HBM의 성공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경쟁의 시작이다.

HBM이 구축한 인공지능(AI) 인프라 위에서 최종 가치를 가져가는 주체는 결국 팹리스다. 시스템반도체는 전 세계 반도체 매출의 65%를 차지하지만, 우리의 점유율은 수년째 2~3%대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최고급 쌀(HBM)'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시장의 최종 가치는 여전히 '레시피와 주방'을 함께 제공하는 플랫폼 기업들이 가져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엔비디아가 세계 1위로 등극한 이유다.

글로벌 시장은 이미 소수의 팹리스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5년 글로벌 상위 10개 팹리스 기업의 매출은 전체 팹리스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엔비디아, 퀄컴 등 미국 기업들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시장 점유율 1% 수준에 머물러 있다. 설계라는 핵심 전장에서 의미 있는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반도체 산업의 '생산 기지'에 머무는 구조적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우리가 팹리스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가장 먼저 풀어야 할 과제는 '생태계의 연결고리' 복원이다. 반도체 강국 대만은 TSMC를 중심으로 설계(미디어텍), 디자인하우스(GUC), 후공정(ASE)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아이디어만 있으면 즉시 칩을 뽑아낼 수 있는 강력한 기반이 된다.

반면 우리나라는 팹리스를 뒷받침하는 생태계 연결고리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이제 한국형 클러스터는 단순 집적을 넘어 파운드리-팹리스-세트기업이 설계 단계부터 함께 참여하는 Co-Design 생태계로 진화해야 한다.

다행히 정부는 AI 반도체 선도기업 육성을 위해 50조원 규모의 금융 지원을 투입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이 자금은 단순한 생산 지원이 아닌, 글로벌 경쟁력 있는 설계를 창출하는 '지능형 지식 자본'으로 활용돼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팹리스산업협회는 '투트랙(2-Track) 성장 전략'을 제안한다.

첫째, 첨단공정 부문에서 스타트업이 3~5나노 공정에 도전할 수 있도록 시제품 제작 비용 등 수백억 원에 달하는 자본 부담을 줄여야 한다. 현재 글로벌 시장은 구글 터보퀀트, Arm의 칩 제조 진출, 엔비디아의 차세대 플랫폼 베라 루빈이 맞물린 '퍼펙트 스톰' 국면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통째로 삼키려는 빅테크 생태계 안에서 우리 스타트업이 살아남으려면, 표준화된 환경에서 저비용·고효율 개발이 가능한 공동의 운동장이 절실하다. 엔비디아의 쿠다(CUDA)에 대응하는 'K-AI SW 통합 플랫폼'을 구축해 국가 차원의 표준 생태계를 조성하고 상용화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춰야 한다.

둘째, 대한민국 팹리스 산업의 중추인 메인스트림 공정(22~90나노) 부문을 강화해야 한다. 가전, 자동차, 산업용 칩을 설계하는 중견 팹리스는 매출과 고용을 책임지는 산업의 핵심 기반이다. 이들의 경쟁력을 지탱하기 위해 국내 파운드리 일정 물량을 할당하는 '상생 쿼터제'와 양산 비용을 지원하는 '반도체 제조 바우처' 등 실효성 있는 지원을 통해 '1조원 매출 규모의 앵커 팹리스' 5개를 전략적으로 육성해야 글로벌 시장에서 의미 있는 경쟁이 가능하다.

결국 이때 중요한 것은 국산 칩을 사용할 수 있는 '수요처 확보'다. '국산 칩 의무 채택 비율'을 달성한 기업에 세액 공제나 보조금을 제공하고, 국산 칩 채택에 따른 위험 부담을 완화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지난 반세기는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구축했다. 앞으로는 'AI 반도체 중심 시대'의 주도권을 확보해야 할 시기다. AI 반도체뿐 아니라, 범용 반도체를 포함한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도 세계 시장의 한 축을 점유할 때, 비로소 진정한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팹리스 점유율 10배 성장의 목표를 조기에 달성하고, 글로벌 50위권 내 5개 기업 육성을 통해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반도체 설계 강국으로도 확고히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한다.

김경호 한국팹리스산업협회장 kyungkim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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