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의 한 전통주 양조장이 인공지능(AI) 기반 제조 혁신 실험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양조테크 스타트업 슬로커(대표 김정혁)가 국내 최초로 ‘인공지능 전환(AX) 양조장’을 구축하고 전통주 제조의 핵심이던 ‘명인의 감각’을 데이터 기반 제조 체계로 전환하고 나섰다. 전통주 산업과 제조 AI를 결합한 새로운 푸드테크 모델이 충남에서 현실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명인의 노하우”를 데이터로…제조공정 바꾼다
슬로커가 공개한 인공지능 전환(AX) 양조장 시스템의 핵심은 단순 자동화가 아니다. 발효와 증류 전 과정을 스스로 학습하고 최적화하는 제조 AI 운영체제(MOS·Manufacturing Operating System)를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기존 전통주 산업은 계절과 원재료 상태, 누룩 품질, 숙련자의 경험에 따라 품질 편차가 크게 발생하는 구조다. 제조 노하우가 사람 중심으로 축적되다 보니 대량생산 체계 구축과 글로벌 유통 확대 과정에서도 한계를 드러냈다. 슬로커는 이 같은 구조적 문제를 데이터 기반 제조 시스템으로 풀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 구축한 스마트 증류소는 연간 약 350만 병 규모의 생산 역량을 갖췄다. 양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도와 당도(브릭스·Brix), 용존산소(DO), 교반 속도, 압력, 습도, 발효 속도 등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분석한다. 회사는 여기에 제조 인공지능(AI) 공정 모델링 기술을 적용했다. 발효 상태와 알코올 도수, 품질 변화, 종료 시점 등을 예측하는 인공지능(AI) 모델을 구축하고, 비전센서와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기술을 연동해 제조 상태를 실시간 모니터링하는 구조로 설계했다.
특히 슬로커는 ‘예측-판단-제어-환류’가 가능한 피지컬 인공지능(AI) 기반 제조 시스템 구현에 집중하고 있다. 실제 제조 데이터를 디지털 트윈 환경에서 반복 학습시키고 베이지안 최적화(bayesian optimization) 기술을 적용해 최적의 생산 조건을 도출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수를 AI가 스스로 학습하고, 최적화된 조건을 설비 제어 시스템(PLC)과 연동해 자동 제어하는 자율형 양조체계를 고도화한다는 계획이다. 업계에서 슬로커를 단순 전통주 제조업체가 아니라 ‘피지컬 인공지능(AI) 기반 푸드테크 제조기업’으로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화재 발굴·투자난 넘은 스타트업
슬로커의 성장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2022년 창업 이후 초기 엔젤투자를 유치하며 빠르게 사업을 확장했지만, 스마트 증류소 건축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와 마주했다. 건축 예정 부지인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일대가 조선시대 관아 외문루 부지로 확인돼 국가유산청 발굴조사가 진행됐고, 실제 문화재가 발견되면서 약 1년간 착공이 지연됐다. 여기에 투자시장 경색도 겹쳤다. 후속 투자 유치가 수차례 무산되면서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고, 착공 이후에도 하청 시공사의 부실시공 문제가 발생해 특수 배관을 전면 재시공하는 등 준공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슬로커는 멈추지 않았다. 창업 초기부터 함께한 전문 인력을 중심으로 스마트 양조 공장 제어 기술 연구개발을 이어갔고, 발효정보 측정 기반 제조 제어 기술 관련 핵심 특허도 출원·등록했다. 올해 들어서는 실리콘밸리 기반 AI 기술 인프라 기업과의 협업도 확대하고 있다. 제조 데이터를 기반으로 공정을 스스로 최적화하는 기술이 국내 전통주 산업을 넘어 글로벌 푸드테크 영역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슬로커가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양조 자동화’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제조 데이터를 축적해 표준화 가능한 산업 구조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조업 전반의 AX 흐름과 맞닿아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통산업으로 여겨지던 양조업이 데이터 산업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지역 제조업 혁신 모범사례로도 관심을 끈다. 충남이 추진 중인 인공지능(AI) 기반 산업 전환 전략과도 맞물린다.
◇‘K-소주’ 넘어 프리미엄 증류주로 해외 공략
슬로커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주 중 하나인 한산소곡주의 제조 철학을 현대 기술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받는다. 이 회사는 한산소곡주 우희열 명인의 전수자인 나장연 명인과 공동 설립했다. 1500년 전통 제조 철학과 첨단 제조기술을 결합한 ‘양조테크(Brewery Tech)’ 기업을 지향한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정부가 최근 K-술 산업 육성과 전통주 세계화에 속도를 내면서 전통 양조 산업의 디지털 전환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슬로커는 제조 표준화 기반 대량생산 체계를 통해 글로벌 시장 확대에 선제 대응하겠다는 전략이다.
회사는 올해 하반기 미국 50개 주 시장 진출을 목표로 북미 유통망 확대에 나서고 있다. 미국 현지 수입 및 유통사 진명, 알티엠(RTM) 등과 K-소주 브랜드 공급 계약도 추진 중이다. 향후 유럽과 아시아 프리미엄 시장까지 진출 범위를 넓힌다는 계획이다. 미국 나파밸리 와이너리 프로젝트와 연계한 오크 배럴(oak barrel) 숙성 제품 개발도 병행한다. 한국 전통 증류주에 글로벌 프리미엄 스피릿(spirit) 시장(고가의 품질과 브랜드 가치를 앞세운 세계 고급 증류주)의 숙성 기술과 브랜딩 전략을 접목해 새로운 프리미엄 K-스피릿(K-Spirit) 시장을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슬로커는 최근 투자사로부터 프리 시리즈A(Pre-A) 투자 유치를 추진 중이다. 확보한 자금은 제조 AI 고도화와 글로벌 유통망 확대에 집중 투입할 계획이다. 또 전국 약 120개 회원사를 보유한 한국전통민속주협회와 전략적 업무협약(MOU)을 맺고 제조 레시피 데이터 표준화 체계를 구축하고, 중소 전통주 업계 전반의 제조 데이터를 축적해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는 방침이다.
김정혁 대표는 “기존 생산관리시스템(MES)이 제조 현황을 단순 관리하는 수준이었다면 인공지능 전환(AX) 양조장은 제조 데이터를 기반으로 공정을 예측·판단·제어·환류하는 AI 운영체제 개념에 가깝다”며 “전통주 산업에서 명인의 감각과 경험을 디지털 자산으로 전환하는 것이 핵심 목표”라고 말했다.
서천=강태우 기자 kt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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