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럽의 디지털 규제 흐름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럽은 디지털 생태계를 미국과 중국에 내준 뒤 유럽 개인정보보호법(GDPR), 디지털시장법(DMA) 같은 강력한 규제를 선제적으로 도입하며 글로벌 디지털 규제의 설계자 역할을 해왔다. 이른바 ‘브뤼셀 효과’다.
그러나 자국 플랫폼 없이 규제만 앞세운 결과 빅테크의 시장 지배력은 더 공고해지고 규제 대응 비용이 유럽 경제에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돌아왔다. 유럽 소비자들이 최신 기술에서 소외됐고 촘촘한 규제가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의 성장에 족쇄가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디지털경제연구원의 이슈페이퍼에 따르면 DMA 시행에 따른 유럽연합(EU) 서비스 부문의 손실은 최대 1140억 유로에 이르며 연간 976억 달러의 추가 비용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역시 AI 주도권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한국은행 지식서비스 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지식서비스 무역수지는 102억5000만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클라우드, AI 구독료, 소프트웨어 사용료 등 해외 빅테크에 지불하는 비용이 늘어나면서 디지털 영역의 외화 유출 압력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다행히 우리의 출발선은 유럽과는 다르다. ‘피지컬 AI’ 시대에 AI 전환(AX)을 위한 제조업과 플랫폼 역량을 모두 확보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현대자동차, LG, 두산에서 네이버와 카카오모빌리티까지 피지컬 AI의 핵심 영역으로 꼽히는 AI 팩토리, 로봇, 자율주행 분야에서 글로벌 최고 수준의 제조 역량과 대규모 플랫폼을 동시에 갖춘, 전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혁신 강국이 바로 한국이다.
특히 이 플랫폼들은 단순한 민간 서비스에 그치지 않는다. 이용자 접점, 데이터, 결제, 콘텐츠, 이동, 지역 상권이 연결된 국내 디지털 경제의 핵심 인프라다. 생태계 구축과 데이터 플라이휠 확보가 피지컬 AI의 승부처로 주목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 플랫폼들은 국가의 글로벌 경쟁력을 위한 거점이 된다. 한국 플랫폼 생태계의 전략적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앤스로픽 사태가 남긴 메시지는 명확하다. AI 시대에 기술과 플랫폼은 단순 서비스가 아니라 경쟁력의 문제다. 유럽의 사례는 산업 전략 없이 규제만 앞설 때 오히려 자국 경제의 성장을 저해하는 부메랑이 돼 돌아올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규제 대응 비용은 이미 규모와 자본을 갖춘 글로벌 빅테크보다 빅테크에 맞서기 위해 성장이 절실한 자국 기업에 더 큰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플랫폼의 성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이 축적해온 디지털 생태계를 어떻게 글로벌 경쟁력으로 키울 것인지에 대한 산업 전략이다.박성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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