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올림픽 찬란한 영광에 가려진 비극…창작오페라 '양철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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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양철지붕'의 무대와 등장인물 / (c)오페라팩토리

오페라 '양철지붕'의 무대와 등장인물 / (c)오페라팩토리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서울’이 호명되던 순간, 서울은 세계적인 경제 도시로의 도약과 함께 대한민국이 스포츠와 문화 강국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의 경제 성장과 국제적 위상을 드높인 이벤트였지만, 그 화려한 도약 이면에는 도시화의 명과 암이 공존했다. 도시 정비라는 이름 아래 판자촌과 양철지붕으로 지어진 달동네가 철거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쫓겨났다.

오페라 '양철지붕'에서 함바집에 모인 등장인물들 / (c)오페라팩토리

오페라 '양철지붕'에서 함바집에 모인 등장인물들 / (c)오페라팩토리

이러한 시대적 맥락을 담은 창작오페라 양철지붕(오페라팩토리 제작)은 올림픽을 1년 앞둔 1987년 건설 현장을 배경으로 한다. 건설 노동자들이 고된 일과 후 식사와 잠깐의 휴식을 취하던 함바집에서, 인간의 폭력성과 숨겨진 과거가 드러나는 비극적 이야기가 펼쳐진다. 함바집 여주인 유현숙(메조소프라노), 언어장애를 가진 여동생 유지숙(소프라노와 연기자), 그리고 복수를 꿈꾸는 의붓동생 조성호(테너)와 과거의 연인 구광모(바리톤)가 목숨을 걸고 펼쳐내는 비극적 이야기는 도시화 속에서 묻혀버린 소외된 인간의 슬픈 삶을 대변한다.

지난 17일과 18일 대구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오른 '양철지붕'은 202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 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된 초연 이후, 2차 제작 지원을 통해 한층 더 완성도를 높였다. 작곡가 안효영은 재공연에서 음악적 디테일과 서사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으며 초연보다 깊은 작품의 음악적 진화와 감정의 깊이를 선보였다. 가장 큰 변화는 구광모의 소멸 직전에 조성호, 구광모, 유현숙, 유지숙 네 인물이 부르는 4중창이 추가된 점이다. 이 장면은 네 명의 등장인물이 저마다 가슴 깊이 품고 사는 갈등의 절정을 극적으로 표현하며, 네 인물이 처한 고통과 희망, 원망과 복수를 한 곡 안에 담아내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언어장애를 가진 유지숙을 무대 위에서 연기한 배우 주은주와 오케스트라 파트에서 유지숙의 내면의 목소리를 노래한 소프라노 김예은이 부른 아리아 ‘세상은 듣지 않아’는 초연 당시보다 길이와 규모가 확장되어 더욱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 아리아의 장면은 유지숙의 내면적 절규와 사회의 무관심을 드러내며, 관객들에게 작품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곡가 안효영은 초연 이후 각 장면마다 상황에 따른 감정이 관객에게 음악을 통해 먼저 다가갈 수 있도록 라이트 모티브(유도동기)를 강조했다. 또 오케스트레이션을 매끄럽게 다듬어 공연의 몰입도를 극대화했다. 불협화음으로 쓰여진 갈등 장면과 음산한 분위기로 쓰여진 반전 장면의 음악이 무거운 스토리의 드라마와 함께 재생돼 관객에게 더욱 강렬한 감정적 경험을 선사했다.

오페라 '양철지붕'에서 구광모와 유현숙의 재회 장면 / (c)오페라팩토리

오페라 '양철지붕'에서 구광모와 유현숙의 재회 장면 / (c)오페라팩토리

연출을 맡은 장서문은 단순하지만 강렬한 무대 구성을 통해 도시화 과정의 명암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특히 양철지붕이 열리고 닫히는 장면은 과거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과 맞물리며 극적 긴장감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또한 붉은 색의 막에 조명으로 만든 그림자가 전하는 움직임들은 잔인한 폭력과 살인 현장이 보는 이들의 분석을 통해 이해하게 만들어 눈 앞에서 직접 보는 것보다 더욱 잔인하게 다가왔다. 이 같은 연출적 기법은 시각적 효과를 넘어 작품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효과를 자아냈다.

구광모가 유현숙 자매를 9년 만에 다시 만나 자신만의 폭력적인 방법으로 애정을 드러내는 장면과 연출은 인간의 폭력성과 내면의 상처를 냉정하게 돌아보게 하며 관객들에게 깊은 성찰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일부 장면에서는 감정 표현이 과해 다소 무겁게만 느껴질 수 있어 연출적 균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기도 했다.

오페라 '양철지붕' 에서 의붓남매들의 재회 장면 / (c)오페라팩토리

오페라 '양철지붕' 에서 의붓남매들의 재회 장면 / (c)오페라팩토리

이번 작품에 출연한 성악가 중 구광모 역의 바리톤 최병혁과 박기태 역의 베이스 박의현은 그들의 역할을 완벽히 소화하며, 실제 건달과 건설현장 소장을 무대에 세운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박기태 역의 박의현은 레치타티보(음이 있는 대사)를 읊조릴 때마다 각기 다른 음색으로 섬뜩한 감정을 표현하며 여러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해 온 존재감을 드러냈다. 또한 세 명의 노가다꾼 중 정갑수 역의 테너 노경범과 김진구 역의 바리톤 한진만은 과장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로 작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극 중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의붓남매인 유현숙을 향한 조성호의 복수는 저마다 지켜야 할 가족에 대한 보호와 상실로 인해 발생한 대립 장면으로 보는 내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유현숙 역의 메조소프라노 신성희는 힘이 있는 저음과 풍성한 울림으로 무대를 채워내며 연약한 동생을 보호하는 언니의 강인함을 표현했다. 조성호 역의 테너 강현욱은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 절규를 들려주며 성취한 가족(의붓 남매)에게 잃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어린 동생의 원망 어린 감정을 부족함 없이 표현하며 작품의 반전을 이끌었다.

양철지붕은 숨기고 싶은 과거와 숨겨야 하는 현실을 사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 사회의 명과 암을 조명한 작품이다. 도시화와 경제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소외된 인간의 삶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으며, 작품은 이러한 문제를 관객들에게 강렬히 환기시킨다. 이 작품은 단순히 잔인하고 슬픈 비극적 과거를 그린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빛과 그림자를 되돌아보게 하는 강력한 울림을 전했다.

조동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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