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의 작품 세계는 인류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범위로 확장됐다. 전시장에서 만난 이불 작가는 “누구나가 그렇듯 젊을 때는 나 자신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만, 나이가 들며 관심의 대상이 더 넓어진 것뿐”이라며 “‘여전사’나 ‘한국 작가’ ‘여성주의 작가’처럼 한 단어로 정의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불 작가(61)를 품기에 1990년대 한국은 너무 좁았다. 지나치게 파격적이라는 이유로 국내 미술계에서 배척당하던 그를 세계가 먼저 알아봤다. 1997년 이불은 불과 30대 중반의 나이로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전시를 열었다. 이듬해 구겐하임미술관의 휴고보스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1999년에는 베네치아비엔날레 본전시와 한국관에 동시에 작품을 내고 특별상을 수상했다. 그야말로 혜성과도 같은 등장이었다.
그 후 20여 년간 이불은 세계 최고 현대미술 작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끊임없이 세계적인 미술관들에서 전시를 열고 신작을 발표했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정면 외벽에 조각상들을 장식한 게 단적인 예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작가”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국내 대중은 이불의 성공과 위상을 제대로 체감하지 못했다. 세계 최고의 작가들이 대개 그렇듯, 국내 전시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가 있긴 했지만 초기작 위주였다.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의 ‘이불: 1998년 이후’가 올가을 가장 주목받는 전시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50여 점의 작품을 모아 ‘세계적 거장’이 된 이불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전시다. 김 부관장은 “전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소장가들이 보유하고 있는 이불의 작품을 빌려오느라 애를 먹었다”며 웃었다.
관객 압도하는 ‘비주얼 쇼크’
이불은 어떤 작품을 만드는가. 이 질문에 한마디로 답하기는 쉽지 않다. 다루는 주제가 워낙 넓고 깊어서다. 곽준영 리움미술관 전시기획실장은 “작가가 아니라 철학자나 사상가로 불러도 무리가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는 논문이나 책으로 펴낼 만한 역사적·철학적 주제를 작품으로 풀어낸다. 전시장 초입에 있는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2016)이 그렇다. 공중에 떠 있는 이 은빛 비행선 모양의 풍선은 길이만 17m에 달한다. 설명 없이도 보는 이를 압도하지만, 이 설치작품에는 역사적 맥락과 인류 문명의 허망함, 이에 대한 연민 어린 시선이 동시에 담겨 있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작품의 모티프는 20세기 초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비행선 ‘힌덴브루크호’. 당시 비행선은 비행기와 경쟁하는 인기 운송 수단이었다. 특히 당시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힌덴브루크호는 인류 기술 발전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 비행선은 1937년 착륙 도중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염에 휩싸여 추락하는 비극을 맞았다. 이 사고로 비행선 산업은 붕괴했고, 힌덴브루크호는 ‘문명의 실패’를 상징하는 이름이 됐다. 배로 치면 타이태닉호와 같은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인간의 실패한 야망을 다루는 작품이다.
하지만 작품에 허무주의만 담긴 건 아니다. 천이나 금속 필름 등 가볍고 약한 재료로 풍선을 제작한 덕분에 작품은 공기 흐름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거나 펄럭인다. 이는 생명체의 연약한 피부를 연상시킨다. ‘취약할 의향’이라는 제목처럼, 인간이란 실패를 거듭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면서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지닌 존재다. 이불이 만든 비행선은 그 취약하지만 쉽게 꺾이지 않는 의지를 상징한다. 이렇듯 방대한 내용을 참신하면서도 압도적인 작품에 담는 게 이불의 특징이다.
이어지는 1층 전시관 ‘블랙박스’ 공간은 현란하게 꾸며져 시각적인 충격을 선사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은 ‘태양의 도시 2’(2014)다. 17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톰마소 캄파넬라가 상상했던 ‘모든 것이 투명하게 개방된 이상향’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하지만 작품의 모습은 혼란스럽다. 수많은 거울 조각과 260여 개 전구가 합쳐져 모든 것을 제멋대로 반사한다. 구석에는 ‘노래방 연작’ 중 하나인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I’(2000)이 자리해 있다. 공적이고 사회적인 삶과 개인의 고독, 대중문화 속 개인의 소외를 다뤘다.
이불이라는 작가 담은 ‘도서관’
이불이 20대였던 1980년대 후반, 그는 ‘여전사’로 불렸다. 기괴하고 충격적인 퍼포먼스와 조각을 통해 가부장제와 성차별을 비롯한 한국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 이불의 작품 세계는 인류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범위로 확장됐다. 전시장에서 만난 이불 작가는 “누구나가 그렇듯 젊을 때는 나 자신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만, 나이가 들며 관심의 대상이 더 넓어진 것뿐”이라며 “‘여전사’나 ‘한국 작가’ ‘여성주의 작가’처럼 한 단어로 정의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말대로 이불의 작품은 하나하나가 수많은 내용과 맥락을 담고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상과 일본 애니메이션, 기계적 형상 등을 결합한 사이보그(2001)만 해도 그렇다. 조각상의 표면은 매끈하고 부드럽지만, 머리·팔다리·장기 등 신체 부위 일부가 없어 전체적으로는 불안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완벽한 외모와 신체라는 개념은 허상이라는 것,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몸을 개조해 가며 그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한다는 사실, 일본 대중문화가 인조인간에 굳이 여성의 모습을 덧씌웠듯이 기술 발전은 사회의 권력 구조와 욕망에 의해 이용된다는 관념 등은 작품에 담긴 수많은 의미 중 일부에 불과하다.
이런 작품들이 미술관 두 개 층 공간에 꽉 들어찬 만큼, 전시가 다소 어렵고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벽돌 책’으로 가득 찬 도서관의 책장처럼. 하지만 모든 작품의 세부적인 내용을 전부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게 미술관의 설명이다. 거울로 된 내부 공간에서 여러 복잡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벙커’, 넓지 않은데도 안쪽 공간을 한참 헤매게 되는 거울 미로 ‘비아 네가티바’ 등 배경지식이 없어도 새로운 영감을 얻고 체험할 수 있는 작품들이 전시장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본 뒤 자세한 설명을 확인할 수 있도록 QR코드도 비치돼 있다. 리움미술관과 홍콩 현대미술관 M+가 공동 기획한 이번 전시는 내년 1월 4일 한국에서 막을 내린 뒤 3월 M+로 이어진다. 이후 2027년 하반기까지 주요 해외 미술관 등을 돌며 순회 전시를 할 예정이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