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0조 날렸다" 기업들 '발칵'…직원 괴롭힌 '리스크' 정체 [글로벌 머니 X파일]

4 hours ago 2

입력2025.11.10 06:40 수정2025.11.10 06:40

메타는 2021년 콘텐츠 모더레이터 집단소송에서 8500만 달러 규모의 합의금을 지급하는 데 동의했다. 사진은 202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에서 참가자들이 메타 부스를 방문하는 모습. AP연합뉴스

메타는 2021년 콘텐츠 모더레이터 집단소송에서 8500만 달러 규모의 합의금을 지급하는 데 동의했다. 사진은 202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에서 참가자들이 메타 부스를 방문하는 모습. AP연합뉴스

"번아웃이 재무제표 삼킨다"…글로벌 기업 덮친 정신건강 리스크 [글로벌 머니 X파일]

최근 글로벌 산업계에서 '직원 정신건강'이 주요 재무 리스크로 떠올랐다. 기업의 '복리후생'으로 여겨졌던 직원 정신건강 문제가 법무, 재무의 영역으로 이동하면서다. 최근 일부 국가에선 직원의 심리적인 문제로 기업 경영 전략 자체가 형사 처벌 받는 사례도 나왔다.

우울과 불안으로 120억 근로일 '삭제'

10일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우울증과 불안으로 매년 약 120억 근로일이 사라지는 것으로 추정됐다. 이에 따른 생산성 손실 규모는 약 1조 달러에 이른다. 근로 연령대 인구의 15%가 정신질환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근로자의 정신 건강 문제가 단순한 보건 문제가 아니라, 기업의 재무성과에 직결되는 경제적 리스크가 됐다는 뜻이다.

기업이 직원의 정신건강 문제를 방치할 경우, ‘보이지 않는 손실’은 기업 손익계산서에 반영됐다. 영국 딜로이트의 지난해 분석에 따르면 영국 내 기업들은 근로자 정신건강 악화로 인해 연간 510억 파운드의 비용을 부담한 것으로 계산됐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손실 요인은 이른바 ‘프리젠티즘(Presenteeism)'이다. 약 240억 파운드 규모에 달한다. 프리젠티즘은 직원이 출근은 하지만 스트레스나 불안으로 정상적인 생산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외형적으로는 근무 중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비효율적인 근로가 지속되는 셈이다. 이직으로 인력 교체 및 재교육 비용(200억 파운드), 결근으로 인한 직접 손실(70억 파운드)이 뒤따른다.

claude.ai

claude.ai

직원 정신 건강 관리 법제화

직원의 정신건강이 기업 경영의 핵심 이슈로 부상한 배경에는 ‘법제화’라는 흐름이 있다. 2021년 국제표준화기구(ISO)가 발표한 ISO 45003(심리사회적 위험 관리 가이드라인)가 계기였다. 이 표준은 기존의 산업안전보건경영시스템(ISO 45001)을 보완하는 공식 가이드라인이다. ‘직원의 정신건강’을 ‘기계 안전’과 같은 수준의 관리 가능한 산업안전보건 리스크로 규정했다.

ISO 45003은 단순히 ‘정신건강 관리’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수준을 넘는다. 기업이 번아웃·스트레스 등을 유발할 수 있는 조직 내 요인을 구체적으로 식별하고 평가하며 통제하는 절차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과도한 업무량이나 권위적인 리더십 등 심리적 부담을 초래하는 요인을 물리적 위험처럼 관리하라는 것이다.

각국은 관련 정책과 법 제정에 나서고 있다. ‘연결 차단권(Right to Disconnect)’ 제도 확산이 대표적이다. 호주는 ‘심리사회적 위험 관리’를 법적 의무로 규정한 세계 첫 국가다. 근로시간 외 업무 연락을 거부할 수 있는 ‘연결 차단권’을 법제화했다.

대기업은 작년 8월부터, 15인 미만 사업장은 올해 8월부터 의무 적용을 받게 된다. 벤 캐롤 빅토리아주 장관은 “모든 근로자는 정신적으로 안전한 일터를 누릴 권리가 있으며, 사업주는 물리적 위험과 마찬가지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모든 조치를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럽연합(EU)도 움직이고 있다. 프랑스를 비롯한 11개 회원국이 이미 연결 차단권을 제도화했다. EU 집행위원회는 작년 4월 EU 차원의 통합 규제 마련을 위한 사회적 파트너 협의를 공식 개시했다.

미국은 직접적인 입법 대신 관련 법령 해석 강화로 접근하고 있다. 미국 평등고용기회위원회(EEOC)는 지난해 발표한 괴롭힘 방지 가이드라인에서 정신건강을 장애의 한 범주로 명시하며 사용자 책임의 범위를 확대했다. 이는 미국 장애인법(ADA)에 따른 정신건강 관련 차별 소송의 가능성을 크게 높이는 조치로 평가된다.

법원, 직원 막대한 기업에 손해배상 판결

최근 기업이 부담해야 할 관련 ‘비용’이 나오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문제가 발생하면 개인 관리자나 특정 직원의 일탈로 치부됐다. 최근에는 관련 기업 조직의 시스템 설계와 경영 전략 자체가 책임의 중심에 섰다. 기업 리스크의 초점이 ‘누가 잘못했는가’에서 ‘어떤 구조가 잘못 작동했는가’로 이동한 셈이다.

claude.ai

claude.ai

프랑스텔레콤(현재 오랑주) 판결이 대표적이다. 프랑스 최고재판소는 지난 1월, 전직 최고경영자(CEO)를 포함한 경영진에게 이른바 ‘기관적 심리적 괴롭힘’ 혐의를 최종 유죄로 확정했다. 법원은 회사의 구조조정 정책인 인력 감축 목표의 강제 할당, 부당한 이동 배치, 지속적 성과 압박 등이 직원에게 심리적 파괴를 초래하는 ‘유해한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은 기업의 전략적 결정이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으로 보여준 첫 사례로 평가된다.

영국 로펌 클리포드 챈스는 "이번 판결은 개별 관리자의 일탈이 아니라 유해한 기업 정책의 고의적 실행 자체를 범죄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라며 "이는 M&A나 구조조정 등 전략적 결정 과정에서 직원에 대한 영향을 근본적으로 재평가한다는 의미다”고 지적했다.

미국에서는 ‘업무의 설계’가 새로운 기업 리스크로 떠올랐다. 단순히 일의 내용이나 성과를 넘어 ‘어떤 방식으로 일하게 만드는가’ 자체가 법적 책임의 대상이 됐다. 메타의 콘텐츠 모더레이터 집단소송이 대표적인 사례다. 온라인에서 폭력적이거나 혐오 표현이 담긴 게시물을 검토하던 모더레이터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호소하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메타는 2021년 8500만 달러 규모의 합의금을 지급하는 데 동의했다. 이 사건은 기업이 물리적 안전뿐 아니라 정신적·정서적 안전까지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번 흐름은 단순히 콘텐츠 검열 직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AI 학습 데이터 관리, 감정노동 직군, 고객 응대 업무 등 정서적 부담이 필수인 일자리 전체에 해당될 수 있다. ‘업무의 설계’라는 개념이 인사 전략이 아니라 기업의 법적·윤리적 의무를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 되고 있다는 평가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수직적 기업 문화가 법의 심판대에 올랐다. 일본 도쿄지방재판소는 지난 9월 화장품 제조사 D-UP에서 발생한 직원의 괴롭힘 관련 사망 사건에 대해 회사와 대표이사 개인에게 총 1억 5000만 엔의 배상 책임을 명령했다. 이례적인 것은 법원이 사장 개인의 사임까지 명령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금전적 배상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평가다.

claude.ai

claude.ai

사건의 발단은 상급자의 지속적인 언어적 압박과 비현실적인 업무 요구가 직원의 정신적 고통을 악화시켜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졌다는 데 있었다. 일본 사회에서 오랜 기간 묵인돼온 ‘위에서 누르는’ 조직문화, 강압적 리더십과 장시간 노동이 결합한 구조적 문제가 이번 판결을 통해 본격적으로 문제시된 것이다.

직원 정신건강 보험료도 증가

최근 최고재무책임자(CFO)와 보험사들이 정신건강 문제에 주목하는 이유는 재무 리스크 관리의 핵심 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신건강 관련 청구는 전체 건수로 보면 적다. 하지만 한 번 발생하면 비용이 막대하게 치솟는 ‘저빈도-고강도’ 구조를 보인다. 과거 신체적 상해 중심으로 설계된 재무 및 보험 모델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호주 정부 기관인 '호주 세이프워크'에 따르면 정신건강(심리적 상해) 관련 산업재해 청구는 전체의 약 9%에 불과하다. 하지만 중위 보상액은 신체 상해의 3배 이상, 중위 손실 근무일수는 4배 이상 길었다. 정신적 상해가 발생할 경우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직접 보상 비용뿐 아니라, 업무 공백·생산성 저하·조직 분위기 악화 등 간접비용이 크다는 의미다.

관련 수치는 보험사 자료에서 확인이 된다. 캐나다 선라이프는 작년 기준으로 정신건강 이슈가 장기장애(LTD) 청구의 약 40%를 차지하며 전체 질병 중 가장 큰 비중을 기록했고 밝혔다. 독일 뮌헨재보험 역시 정신질환이 장해보험 손해의 22%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직원의 정신건강이 기업의 재무 건전성과 직결되는 구조적 리스크 요인이 됐다는 뜻이다.

근로자의 정신건강 리스크는 투자자와 월가도 주목하는 새로운 재무 변수로 떠올랐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인적자본 공시 의무화를 시행한 이후, 기업들은 연차보고서(10-K)에 직원 정신건강 및 복지 관련 정보를 명시적으로 공개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로펌 '깁슨 던'의 작년 12월 분석에 따르면, S&P100 기업 중 ‘직원 정신건강 및 웰빙’을 언급한 10-K 보고서의 비율이 2021년 38%에서 2024년 54%로 상승했다.

claude.ai

claude.ai

랜드연구소에 따르면, 규정 도입 전 10% 안팎에 머물렀던 기업의 ‘인적자본관리 전용 섹션’ 보유 비율이 90% 수준으로 급등했다. 기업들이 인력 구성, 이직률, 교육·복지 체계, 특히 정신건강 관련 지표를 더 이상 내부 관리용 통계로 두지 않고, 대외 공시를 통해 시장의 검증을 받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런 변화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도 중요한 전환점이라는 분석이다. 과거 ESG 논의가 탄소배출 등 ‘E(환경)’에 집중했다. 이제 투자자들은 ‘S(사회)’ 영역에서 직원의 정신건강, 조직문화, 인적자본 유지 역량을 평가 요소로 본다. 직원의 정신건강은 시장 신뢰와 주가 안정성을 좌우하는 투자 리스크 요인이 됐다.

국가 경제에도 악영향

직장 내 정신건강 악화가 국가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우선 근로시간의 양적 손실이 크다. 영국 산업보건안전청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2022~2023 회계연도 기준 스트레스·우울·불안 등으로 인한 근로 손실일이 1710만일에 달했다. 근로자 1인당 평균 결근일은 19.6일로 집계됐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에 따르면 지난 6월 한 달 동안 정신건강 문제로 인한 병가가 62만 일을 넘어섰다.

질적인 근무 손실도 심각하다. 갤럽의 지난해 조사 결과, 전 세계 근로자의 41%가 “어제 하루 종일 큰 스트레스를 느꼈다”고 답했다. 업무에 출근하더라도 정신적으로 몰입하지 못하는 근로자가 늘어나면서 창의성과 혁신 역량이 약화되고, 조직 전반의 효율성도 떨어진다.

이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멘탈 웰니스’와 ‘행동 건강’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두 시장은 개념적으로 구분된다. 멘탈 웰니스는 예방과 회복, 즉 정신적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반면 행동 건강은 임상적 치료나 관리 중심의 접근을 포함한다. 기업들은 이 두 분야의 솔루션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며, 정신건강 문제를 단순한 복지 차원이 아닌 재무 리스크 관리의 핵심 영역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웰니스 인스티튜트(GWI)의 작년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멘탈 웰니스 시장 규모는 2023년 2326억 달러에 달했다. 오는 2028년까지 연평균 12.21% 성장해 414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조사업체 '그랜드 뷰 리서치'에 따르면 임상 및 재활 서비스, 기업 보험, 근로자지원프로그램(EAP) 등을 포함하는 행동 건강 시장 규모는 세계적으로 2023년 5487억 달러로 추정됐다. 오는 2030년까지 8455억 달러(CAGR 6.42%)에 이를 전망이다.

claude.ai

claude.ai

한국에서도 커지는 기업 리스크

글로벌 흐름은 한국 시장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은 독특한 법적 환경과 시장 구조 속에서 이 문제에 직면해 있다. 2019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시행 이후, 한국의 관련 법적 환경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지난 10월 23일부터 시행된 개정 근로기준법 제76조의3이다. 이는 사용자의 객관적 조사 의무, 피해근로자 의견 청취 의무 그리고 조사 과정 참여자의 비밀 누설 금지 등을 더욱 강화했다.

사법부 역시 '정신적 피해'의 인과 관계와 재무적 영향을 더욱 엄격하게 판단하기 시작했다. 작년 12월 23일 광주고등법원 판결이 대표적이다. 법원은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로 자살한 근로자의 산재 평균임금 산정 기준일을 '사망일'이 아닌, '정신적 이상 상태로 무단결근을 시작한 날'로 보아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는 법원이 업무상 스트레스가 직원에게 끼친 '재무적 손실(임금 삭감)'까지 사법적으로 보정해 준 것이다. 기업의 배상 책임을 금전적으로 명확히 한 판례라는 분석이다.

[글로벌 머니 X파일은 중요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 돈의 흐름을 짚어드립니다. 필요한 글로벌 경제 뉴스를 편하게 보시려면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 주세요]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