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데니이존스 전시 눈길 끌고
8월엔 브래드퍼드 개인전 열려
‘색채파’ 길리엄 작품 고가 거래
정치색 옅은 추상화 위주로 소개
10일부터 서울 용산구 페이스갤러리에서 함께 열리고 있는 개인전의 주인공 샘 길리엄(1933∼2022)과 케네스 놀런드(1924∼2010). 작업 방식이나 내용은 무척 다르지만, 1960년대 미국 워싱턴에 거주하던 ‘워싱턴 색채파’ 추상화가들로 공통점이 적지 않다. 그런데 길리엄의 작품들은 놀런드보다 10배 가까이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길리엄이 흑인 작가라는 점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국내 미술관과 갤러리가 세계 미술계에 불고 있는 ‘블랙 신드롬’를 반영한 듯 최근 주목받는 흑인 미술가들을 잇달아 소개하고 있다. 갤러리 화이트큐브(서울 강남구)도 흑인 작가 툰지 아데니이존스를 올해 첫 전시로 소개했으며,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서울 용산구)은 8월 마크 브래드퍼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 역시 거장 반열에 오른 장미셸 바스키아 같은 흑인 미술가에 대한 인기가 적은 건 아니지만, 이처럼 동시대 흑인 미술가들이 여럿 소개되는 건 상당히 이례적이다.● BLM이 불 지핀 ‘할렘 르네상스’
구세대 추상화가로 분류되던 길리엄이 최근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건 백인 남성 중심의 미술사에서 벗어나려는 글로벌 트렌드와 맞닿아 있다. 김경미 페이스갤러리 PR 디렉터는 “2010년대 후반부터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흑인 예술가들을 적극 알리는 분위기를 만든 게 계기”라며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인 ‘비바 아르테 비바’의 메인 공간에 길리엄의 작품이 설치되며 (주요 작가로) 부상했다”고 설명했다.2020년 흑인 청년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으로 촉발된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 운동도 이런 흐름에 한몫했다. 특히 시위 확산과 함께 1920∼40년대 뉴욕 할렘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화·예술 부흥 운동인 ‘할렘 르네상스’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해졌다. 지난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개최한 대규모 기획전 ‘할렘 르네상스와 범대서양 모더니즘’이 대표적이다. 흑인 작가들의 회화, 조각 등 160점을 소개한 이 전시는 현지에서 “편견 속에서 다뤘던 흑인 문화를 이제야 바로잡았다”는 극찬을 받았다.
물론 흑인 미술에 대한 주목은 정치적 올바름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2004년 터너상을 받은 잉카 쇼니바레처럼, 특유의 감각적 색채와 조형 의식이 화려한 시각 언어를 선호하는 최근 시장의 흐름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 국내 화랑가는 정치색 옅은 작품 선호
한국 미술계도 흑인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지만, 받아들이는 취향은 다소 다르다. 국내에선 인종차별 등 주제 의식보단 작품 자체의 조형성이 주로 선택의 기준이 된다.길리엄 역시 당대 정치 흐름과 상관없는 추상화를 그렸고, 아데니이존스도 캔버스 전면의 꽃잎, 나뭇잎 등 추상적인 패턴이 도드라진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구상보다 대체로 가격이 저렴하며, 깔끔하고 예쁜 작품을 선호하는 국내 컬렉터의 취향과 잘 맞는 편”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최근엔 흑인 작가들의 정치적 메시지에 더 끌린다는 국내 컬렉터들도 조금씩 늘고 있다. 개인 소장가인 류지혜 씨는 최근 해외 갤러리에서 흑인 여성의 정체성을 담은 섀넌 보노, 노예무역을 다룬 퍼비스 영의 작품을 구매했다. 류 씨는 “처음엔 도상이 좋아 끌렸지만, 점점 작품에 내재된 시대적 관점이 매력으로 다가왔다”며 “나의 오래된 가치관이나 편견을 돌아보게 해줘서 끌렸다”고 말했다.강성은 전시 기획자는 “할렘 르네상스처럼 한국도 다양한 정치적 격동기를 보낸 만큼 국내 미술가들이 처했던 시대적 상황과 인권에 대해 다룬 작품을 연구하고 그 가치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할렘 르네상스 |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미국 남부에서 벗어나 대거 이주를 시작하며 1920∼40년대 뉴욕 할렘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화 예술 운동. 랭스턴 휴스(시인)와 조라 닐 허스턴(소설가), 알랭 로크(철학자), 에런 더글러스(화가), 듀크 엘링턴(음악가), 루이 암스트롱(음악가)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인종 차별에 저항하며 흑인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낸 작품들을 창작해,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등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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