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신광영]트럼프 유죄 “법이 보호하는 건 사람 아닌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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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건의 형사 기소를 안고 대선을 치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구한 건 지난해 7월 미 연방대법원 판결이다. 트럼프의 2020년 대선 패배 뒤집기 시도가 대통령 재임 중 이뤄진 광범위한 공적 행위로 볼 수 있다며 면책 특권을 인정해줬다. 그 덕에 트럼프의 다른 재판들이 줄줄이 중단됐다. 기밀 문건 유출이나 조지아주 대선 개입도 ‘공적 행위’로 면책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까지 트럼프의 골치를 썩인 사건이 있다. 성추문 입막음 대가로 성인영화 여배우에게 13만 달러(약 1억9000만 원)를 주면서 회계를 조작해 공금으로 처리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연방대법원 판결 두 달 전에 이미 배심원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이 났다. 미국은 배심원이 유무죄를 가리고 판사가 형량을 정한다. 배심원 평결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을 열흘 앞둔 10일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의 1심 선고가 나왔다. ‘유죄지만 무조건 석방’. 트럼프가 범죄자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징역형을 선고할 경우 대통령직 수행이 불가능한 사정을 고려한 판결이었다.

▷1심 판사는 트럼프를 향해 뼈 있는 말을 남겼다. 대통령 당선자라는 신분이 범죄의 심각성을 줄이거나 정당화하지 않으며, 법적 보호는 직책에 주어지는 것이지 직책을 맡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했다. 법원이 석방시킨 건 미국 대통령이지 피고인 트럼프가 아니란 얘기다. 이 판결로 트럼프는 ‘범죄자 대통령’이란 꼬리표를 단 채 취임하게 됐다.

▷트럼프에게 면책 특권을 부여할지 여부는 미 사법부의 난제였다. 미국은 대통령에 대해선 관례상 기소하지 않는데, 트럼프처럼 대통령이 다수의 범죄 혐의를 받은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논란 끝에 보수 우위의 연방대법원은 대통령직의 안정성이 중요하다며 면책 특권을 폭넓게 인정했다. 대통령이 재임 중 행위로 처벌된다면 의사결정이 위축될 수 있고, 정치적 분열이 커진다는 이유에서였다. 트럼프는 이 판결을 내세워 성추문 입막음 사건의 유죄 평결도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맨해튼 법원은 대통령의 직무 행위가 아닌 개인 범죄까지 용인하진 않는다고 명확히 선을 그었다.

▷어떻게든 처벌을 피해 보려 했던 트럼프지만 사법 절차를 아예 무시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가 법원에 출두하는 날이면 주변이 한바탕 들썩였다. 방탄 리무진을 타고 경호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등장해 법정에서 무죄 주장을 폈으나 판사의 질문에는 예의를 갖춰 답변했다. 구치소로 옮겨졌을 땐 다른 수감자들과 똑같이 키와 몸무게 재고, 머그샷(범인 식별용 사진)을 찍은 뒤 보석금 내고 풀려났다. ‘통제 불능’에 ‘예측 불허’라는 트럼프도 검찰과 법원의 소환 요구에 불응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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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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