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사이에 총길이 900㎞의 말라카해협이 있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가장 중요한 뱃길로 해상 석유 수송의 절반 이상이 이곳을 지난다. 언제든 자유항해가 보장되지만 실질적 제해권은 싱가포르에 태평양함대 기지를 둔 미국에 있다. 말라카해협은 모든 면에서 전략적 요충지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이 해협을 봉쇄하면 상대국 선박들은 시간과 거리비용이 큰 인도네시아 남단으로 우회해야 한다.
2013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표방한 ‘일대일로(一帶一路)’ 중 ‘路’는 바로 이 해협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인도양과 아라비아해, 동쪽으로는 남중국해를 연결하는 독자적 해상 통로를 건설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국 영향력을 견제해야 하는 중국 입장에선 말라카해협 좌우 바다의 해상 교두보 확보와 지배력 확대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장차 대만 접수를 위해서라도 ‘말라카 딜레마’는 큰 걸림돌이다. 중국은 그동안 주변 국가들에 대한 퍼주기와 무력충돌을 병행하는 강온 책략으로 파키스탄 스리랑카 등 인도양 연안 국가들에 군사기지를 만들고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이 포진한 남중국해에도 인공섬과 해군기지를 잇따라 건설해왔다.
그 당연한 수순으로 중국 해군력은 지난 10여 년간 양적 팽창을 거듭해왔다. 특히 근해 공략을 위한 초계함과 연안전투함을 압도적 격차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항공모함 11척, 순양함 52척, 구축함 76척으로 먼바다를 경영하는 선단에선 중국(항공모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36척)을 크게 앞서고 있지만 남중국해 같은 바다에서 수적 우위를 앞세운 중국 해군의 기동력을 직접 상대하기가 어렵다. 중국과 이웃나라들 간 영해 분쟁에 일일이 개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미국의 군함 건조 능력은 조선산업 생태계 붕괴로 완전히 바닥권이다. 순양함 52척 가운데 무려 43척이 수리 또는 퇴역 대기로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조선은 여전히 노동집약적 성격이 강한 전통 산업이다. 인재와 자본을 싹쓸이하는 천하의 미국이라도 오래전부터 사장되기 시작한 인력과 기술을 되살릴 길이 없다. 반면 중국 조선업은 이미 전 세계 시장의 70%를 점유할 정도로 막강한 생산능력을 구축하고 있다. 상하이 인근 장난(江南)조선소와 랴오닝성 다이롄(大連)조선소들은 상선과 군함을 마치 금형제품 찍어내듯이 만들어내고 있다.
오는 20일 출범하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정책이 바이든 정부와 다른 점은 무역 장벽과 공급망 차단을 넘어서는 해상 봉쇄다. 아직도 갈 길이 멀고 효과도 분명하지 않은 우주영토 개척보다 당장 눈에 보이고 안보상으로도 시급한 제해권을 장악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트럼프가 느닷없이 파나마운하 운영권과 그린란드 매입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양쪽 모두 중국 자본이 급속히 침투하고 있거나 해상 침투가 본격화하는 곳이다.
이 같은 정세 변화는 트럼프 폭주 시대를 걱정하는 우리나라에 한 줄기 빛과 같은 호기다. 트럼프에는 한국 외 대안이 없다. 미국이 말라카해협과 파나마운하 그리고 아라비아해 제해권을 포기할 수 없다면 트럼프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한국을 버릴 수 없다. 당장은 군함 유지·보수·정비(MRO)로 시작하지만 장차 군함 신조 수주는 따놓은 당상이다. MRO 발주는 그 자체로 전력 기밀을 노출하는 행위다. 상대를 믿지 못하면 맡길 수가 없다. 군함의 세계에서 MRO 따로, 건조 따로는 없다. 바야흐로 한국 조선업의 대항해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조선이 닻을 올리면 철강과 기계와 방산도 달린다.
한·미 동맹의 질적 발전은 더욱 중요하다. 첨단 무기와 군사장비를 미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해온 구도에서 벗어나 상호 의존적이고 호혜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발판을 만들 수 있다. 한국은 이제 반도체·배터리에 조선까지 아우르는, 미국 공급망의 핵심 기지이자 대양의 말라카해협 같은 전략적 위상을 확보할 판이다. 트럼프가 이런 동맹국에 어떻게 관세폭탄을 때리고 안보적 배신을 자행할 수 있겠나. 안팎으로 어렵고 고단한 시기에 정말 오랜만에 가슴을 쓸어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