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은 거침없었다. 피터 나바로 백악관 고문은 “90일 동안 90개국과 무역협정을 맺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취임 100일을 앞둔 24일 현재 실제 체결된 나라는 한 곳도 없다. 미국은 이번 주 한국 일본 태국 인도와 협상을 벌이고 있다. ‘동맹국과 우방국 먼저’라는 미국의 제안에 따른 것인데, 관세 외에도 안보와 투자까지 패키지 딜로 다룰 수 있어서 단기간에 결론짓기 어렵다는 전망이 많다.
▷궁지에 몰리다 보니 트럼프로선 체면 불고하고 생각을 뒤집는 일이 잦아졌다. 그는 22일 145% 대중국 관세에 대해 “그렇게 높게 유지될 수 없다. 중국을 매우 잘 대해줄 거다”라고 말했다. “중국 하기에 달렸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선제적인 유화 제스처였다. 금리 인하를 요구하면서 교체 가능성을 흘렸던 제롬 파월 연준(FRB) 의장에 대해서도 “교체할 뜻이 없다”고 돌아섰다. 145%라는 상식 밖 관세를 매기거나, “언제 그를 해고(termination)하더라도 빠른 게 아니다”라고 할 때의 호기로움은 안 보였다.
▷트럼프의 변덕은 미국과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한 결과다. 그는 “참 아름다운(beautiful) 단어가 관세인데, 관세를 매겨 다시 부자가 되자”며 관세 전쟁의 승리를 당연시했다. 안보 이슈에서도 “내가 취임하면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전쟁은 몇 주 내로 끝난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현실 세계는 트럼프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백악관은 충성파로 채워져 있다. 이들은 트럼프가 세운 불가능한 목표를 두고 “이건 어렵다” “달리 접근해 보자”는 의견을 내지 못했다는 게 미 언론의 평가다.▷트럼프를 실제로 멈칫하게 만든 것은 시장의 힘이다. 트럼프가 관세를 발표할 때마다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은 약세를 면치 못했다. 개인투자자, 연금가입자의 자산이 줄어드는데 버틸 정치인은 없다. “중국 제품이 안 들어오면 2주 뒤엔 매대가 텅 빌 수 있다”는 대형 유통사 사장들의 경고에 트럼프는 위축됐다. 트럼프의 오락가락은 국제질서에 예상보다 더 큰 리스크를 안겼다. 그렇다면 시장의 힘을 절감한 트럼프가 속도 조절에 나설까.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혼란이 큰 약이 된 셈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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