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지젤'(유니버설발레단) 1막. 연인의 배신으로 정신을 잃는 지젤을 연기 중이던 발레리나 홍향기가 무겁게 한걸음을 뗐다. 곧바로 마에스트로의 지휘봉이 허공을 가로질렸고 극적인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울려퍼졌다. 지젤은 미쳐가는 와중에도 손끝과 발끝으로 음표를 그려나갔다.
윌리(처녀 귀신)가 된 지젤은 2막에서 자신의 무덤을 찾아온 연인 알브레히트를 살리기 위해 절절한 비올라 선율에 몸을 맡기고 슬픈 2인무를 이어갔다. 홍향기의 파트너는 발레리노 전민철. 객원무용수로 함께 한 그는 개막일(18일)과 이날 알브레히트로 나섰다. 미르타(윌리의 여왕)의 주술에 걸려 죽을 때까지 춤을 추는 알브레히트를, 그는 서른 번이 넘는 '앙트르샤'(점프한 뒤 공중에서 발을 빠르게 교차하는 동작)로 표현하며 카타르시스를 안겨줬다. 빨간 구두를 신은 카렌이 춤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앙트르샤 역시 멈출 줄 몰랐다. 전민철은 박자를 잘게 쪼개가며 꼿꼿이 뛰어올랐는데, 마에스트로의 시선은 그가 쓰러질 마지막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오케스트라와 무대 위를 분주하게 오갔다. 무용수와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주고 받는 긴장감 속 유니버설발레단의 지젤은 완성도 있게 절정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고전발레 '지젤'은 유니버설발레단의 주특기이기도 하다. 1985년 초연해 40년동안 정기공연만 약 1500회에 이른다. 팬데믹 시기에도 지젤만큼은 무대에 올렸다. 지난 19일에는 낮공연 지젤 역할의 무용수가 부상을 입어 2막에 설 수 없게 됐는데, 저녁 공연의 주연이 바로 무대에 투입되며 더 큰 박수를 받았다. 위기를 맞았지만 40년의 저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파트너가 바뀌어도 알브레히트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케스트라 역시 급작스레 투입된 주역의 무용 스타일을 수많은 리허설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아돌프 아당이 작곡한 지젤의 음악은 난곡이다. 발레에 초점을 맞춰 작곡됐기에 모든 음표에 동작과 마임이 1대1 대응돼 있다. 그렇다고 춤추기에 쉽지도 않다. 0.01초만 늦어도 꽉 짜여진 작품 분위기가 달라지는 예민한 음악이어서다. 홍향기와 전민철은 어려운 음악 속에서, 사랑보다 더 큰 회개와 구원, 용서라는 숭고한 감정을 고난도 발레 테크닉 위에 선보였다.
지중배 지휘자는 "발레 '지젤'의 음악은 후대 작곡가인 차이콥스키의 발레곡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여유나 자연스러운 흐름이 적은 편"이라며 "아당이 직관적으로 악보를 써서 오케스트레이션과 발레단의 조화로운 궁합이 요구된다"고 설명했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지중배 지휘자는 서로 친숙하다. 지난해 '라 바야데르'에서도 3막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했던 전력이 있다.
두 주역의 호연을 더욱 빛나게 만든 것은 윌리들의 군무였다. 저승의 아가씨들을 그려내기 위한 단원들의 피나는 노력 덕분에 비현실의 세계가 2막 내내 그대로 객석에 전이됐다. 이들이 새털같은 움직임으로 칼군무를 이룰 때 변주와 같은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움직임은 더욱 애잔한 울림을 주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지젤'에서는 다른 발레단과 구분되는 연출과 안무도 눈에 띄었다. 묘지 비석이 180도로 휙 돌면서 뿌연 연기 속에 윌리가 된 지젤이 베일도 없이 등장하거나, 백합을 들고 지젤의 무덤을 찾아온 알브레히트 앞에 어느 윌리가 공중에서 백합을 뿌려주며 그 꽃말(용서)을 되새기게 만든다. 지젤의 친구들이 1막에 추는 패전트 파드되(2인무)는 수년전부터 유니버설발레단이 재해석한 패전트 파드시스(6인무)로 변형됐다. 농가의 활기찬 기운이 6인무에서 보다 잘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공연은 27일까지.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