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 넘은 스즈키, 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나[딥다이브]

4 hours ago 2
일본 자동차 시장에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2025년도 신차 판매 2위 자리에 혼다를 제치고 사상 처음으로 스즈키가 올라섰어요. 특이한 건 스즈키가 수입차 판매 1위까지 차지했다는 거죠. 인도에서 생산한 스즈키 차량이 일본으로 역수입돼 돌풍을 일으킨 겁니다.

44년 전 불모지나 다름없던 인도 자동차 시장에 진출했던 스즈키. 그 도약의 중심엔 고 스즈키 오사무 전 회장(1930~2024년)이 강조했던 ‘중소기업형 경영’이 있죠. 약자가 승리하는 방법이 뭔지를 보여주는 사례, 스즈키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스즈키의 일본 시장 도약의 주역 모델인 짐니 노마드. 인도산 오프로드 모델인 짐니 노마드의 일본 판매 가격은 최소 292만 엔(약 2700만원)이다. 스즈키 제공

스즈키의 일본 시장 도약의 주역 모델인 짐니 노마드. 인도산 오프로드 모델인 짐니 노마드의 일본 판매 가격은 최소 292만 엔(약 2700만원)이다. 스즈키 제공

*이 기사는 5월 8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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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산 스즈키’가 이룬 역전

‘경차의 강자’. 일본 자동차 브랜드 스즈키의 오랜 별명이죠. 그 명성은 1979년 경차 ‘알토’를 47만 엔이란 충격적인 저가에 출시하면서부터 시작됐는데요. 라디오는 물론 시가 라이터까지, 일체의 낭비와 장식을 생략한 알토는 당시 ‘경차=최소 60만 엔’이었던 시장의 공식을 파괴했고요.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일본에 ‘경차 전성시대’를 열었습니다.

스즈키는 일본에선 지금도 경차로 유명하죠. 하지만 2025년도(2025년 4월~2026년 3월) 스즈키가 사상 처음 일본 신차(승용차) 판매 2위로 올라선 건 경차 덕분이 아니었습니다. 소형 SUV ‘프롱크스’와 오프로드 SUV ‘짐니 노마드’가 성장을 견인했죠. 특히 짐니 노마드는 단 4일 만에 5만 건 넘는 사전 주문이 몰려 예약 접수를 중단해야 했을 정도로 인기가 폭발적이었다고 해요.

1979년 출시돼 일본에서 꺼져가던 경차 인기를 되살린 모델 스즈키 알토 1세대. 스즈키 제공

1979년 출시돼 일본에서 꺼져가던 경차 인기를 되살린 모델 스즈키 알토 1세대. 스즈키 제공

프롱크스와 짐니 노마드는 모두 인도산 차량입니다. 스즈키의 인도 합작사인 마루티 스즈키의 현지 공장에서 생산됐어요. 그래서 지난해 스즈키의 약진은 일본 수입차 시장의 판도까지 뒤흔들었죠. 독일 3사(메르세데스-벤츠, BMW, 폭스바겐)가 장악했던 수입차 시장 1위에 처음으로 스즈키가 오른 겁니다.

여러모로 새로운 현상이라 하겠는데요. 그만큼 인도산 스즈키 차량의 품질을 일본 소비자도 신뢰한다는 뜻이겠죠. 마루티 스즈키는 인도에선 40% 안팎의 압도적 점유율로 부동의 1위를 지키는 최대 자동차 제조사이니 말입니다.

인도에서의 탄탄한 입지 덕분에 스즈키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죠. 인도 자동차 시장이 무섭게 성장해 어느덧 일본을 제치고 세계 3위 판매량을 기록 중이니까요. 스즈키는 2012년 미국, 2018년 중국 시장에서 일찌감치 철수했는데요. 그 덕분에 트럼프 관세 폭탄과 중국 전기차와의 혈투를 피하게 됐습니다. 세계 1, 2위 자동차 시장을 모두 포기한 덕분에 되레 잘 나가고 있는 셈이죠. 미국에 치이고 중국에 밀려서 적자 수렁에서 허우덕 대고 있는 혼다, 닛산과는 대조적입니다.그럼 스즈키는 어떻게 40여 년 전에 인도에 진출할 생각을 했을까요. 인도 시장의 놀라운 잠재력을 간파한 선견지명 덕분일까요? 이에 대해 고 스즈키 오사무 전 회장은 “선견지명은 없다”고 여러 번 밝혔습니다. “대기업처럼 선진국에 진출하고 싶었지만, 경차를 만들어 달라는 나라는 없었다”면서 말이죠. 2021년 퇴임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냥 직감에 의존하는 편이었죠. 막무가내로 나아가다 보니 인도가 보였고, 상륙해 보니 꽤 잘 풀렸습니다. 지구상에는 아직 보지 못한 새로운 땅이 있으니 계속 걸어가세요. 행동력으로 발견해 나가면 괜찮을 겁니다.”

꼭 1등을 하고 싶었다

1980년대 초, 스즈키의 경차는 꽤 인기를 끌었지만 여전히 일본 자동차 업계 순위에선 하위권이었습니다. 도요타나 닛산, 혼다 같은 대형 자동차 제조사와 비교하면 자본과 기술, 모든 면에서 열세였고요. 솔직히 게임이 되질 않았죠. 그런데도 스즈키 오사무 당시 사장은 “어딘가에선 1위를 차지하고 싶다”고 강렬히 열망했습니다.

“일본 시장은 어디나 똑같다. 어느 현이든 1위는 도요타, 2위는 닛산이다. 후발 주자인 스즈키가 어느 현에서 1위를 차지한다는 건, 고향인 시즈오카에서도 무리다. 그렇다면 해외로 나가서 1위를 차지하자. 1위를 차지하면 직원 사기는 올라간다. 하지만 선진국에선 스즈키가 잘하는 소형차론 이길 수 없다. 자동차 제조사가 없는 나라에 진출하면 틀림없이 1위가 될 수 있다. 간단하다.

은행원 출신인 고 스즈키 오사무 전 회장은 스즈키 창업자의 손녀딸과 결혼하면서 성씨를 스즈키로 바꾸고 기업 후계자가 됐다. 1978년 사장 취임 당시, 12개 일본 자동차 제조사 중 12위였던 최약체 스즈키를 ‘경차의 강자’이자 ‘인도 시장 부동의 1위’로 키워냈다. 아흔이 넘은 2021년 은퇴할 때까지 스즈키를 이끈 카리스마형 리더였다. 스즈키 제공

은행원 출신인 고 스즈키 오사무 전 회장은 스즈키 창업자의 손녀딸과 결혼하면서 성씨를 스즈키로 바꾸고 기업 후계자가 됐다. 1978년 사장 취임 당시, 12개 일본 자동차 제조사 중 12위였던 최약체 스즈키를 ‘경차의 강자’이자 ‘인도 시장 부동의 1위’로 키워냈다. 아흔이 넘은 2021년 은퇴할 때까지 스즈키를 이끈 카리스마형 리더였다. 스즈키 제공

그렇게 기회를 엿보던 1982년, 오사무 사장은 파키스탄 출장 중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인도 정부가 국민차 생산을 위한 합작 파트너를 찾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게 됩니다. 그는 곧바로 인도대사관을 찾아갔고요. 이미 모집 마감 기한이 지난 후였지만, 간신히 마지막 예비후보로 이름을 올렸죠.얼마 뒤 인도 정부 대표단이 일본으로 찾아왔어요. 그들은 도요타, 닛산, 미쓰비시 같은 주요 자동차 회사를 먼저 만났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난 스즈키 사장은 공장 배치도를 보여주며 열정적으로 의지를 피력합니다. “스즈키는 대형 자동차 제조사만큼 충분한 자금은 없습니다. 하지만 정성을 다해 기술을 전수해 드릴 수 있습니다.

당시 다른 기업 CEO들은 인도 대표단에 잠깐 얼굴만 비친 뒤, 협상은 임원한테 맡겼다고 해요. 기술 이전에 대해서도 구식 모델만 할 수 있다는 식의 소극적 태도였고요. ‘인도에서 차가 팔려봤자 얼마나 팔리겠어’라며 시큰둥했던 거죠. 인도 시장에 진심이었던 CEO는 스즈키 사장뿐이었습니다. 그 엄청난 열의가 인도 대표단을 사로잡았죠.

하지만 스즈키 내부에서조차 인도 진출은 무모하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당시 인도는 연간 자동차 판매량이 고작 4만대 미만인 보잘것없는 시장이었고요. 인프라와 기술력, 노동환경, 규제 등 모든 조건이 척박하기 짝이 없었죠. ‘성공할 리 없다’는 주변의 경고와 설득이 이어졌지만, 그해 10월 스즈키 사장은 인도 정부와의 합작 계약에 서명합니다. 스즈키가 50억 엔(초기 지분율 26%, 현재는 56%)을 투자해 인도 합작사 ‘마루티 스즈키’가 출범했죠.

1983년 인도에서 최초로 생산된 마루티 800 차량과 함께 있는 인디라 간디 총리와 스즈키 오사무 당시 사장. 스즈키 제공

1983년 인도에서 최초로 생산된 마루티 800 차량과 함께 있는 인디라 간디 총리와 스즈키 오사무 당시 사장. 스즈키 제공

1983년 12월, 합작법인의 첫차 ‘마루티 800’이 나왔습니다. 인디라 간디 총리가 직접 1호차 열쇠를 전달했을 정도로 국가적인 이벤트였죠. 일본 스즈키의 경차 ‘알토’를 기반으로 만든 작고 세련된 디자인과 뛰어난 연비(L당 15~18㎞), 저렴한 가격(400만원대)까지. 인도 최초의 국민차 탄생에 인도인은 열광했고요. 마루티 800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이후 십수 년간 인도 승용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합니다.

인도식 실행력과 일본식 시스템

자신만의 강점(소형차 기술력+비용 절감)을 살릴 수 있는 틈새시장을 집중 공략해 성공을 거둔 스즈키. 하지만 인도 문화에 일본식 경영을 접목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죠. 특히 인도의 주가드(Jugaad), 즉 ‘대충 돌아가게 만들면 된다’는 임기응변식 사고방식과 일본의 엄격한 장인정신 ‘모노즈쿠리’, 이 둘은 달라도 너무 달랐는데요.

마루티 스즈키를 설립 단계부터 이끌어온 인도인 경영자 R.C. 바르가바는 “마루티 스즈키가 불가능을 가능케 한 기적을 일으킨 건 팀워크·기술·시스템이라는 일본식 경영과 신속한 의사결정이란 인도의 특징이 상충하지 않고 훌륭한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많은 인도 노동자들이 일본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의 정교한 생산 시스템을 직접 배웠고요. 스즈키는 인도 근로자의 창의적 해결법을 현장개선(카이젠)에 활용했죠. 이를 통해 인도의 울퉁불퉁한 도로에 맞춰 차바닥을 조금 높이고, 먼지와 고온에 맞춰 에어컨 성능을 강화하는 식의 현지화가 이뤄졌습니다. 일본식 제조 철학과 인도식 실행력이 결합한 독특한 기업 문화가 탄생한 거죠.

2025년 스즈키 첫 양산형 전기차 ‘e비타라’ 공개 행사에서 인도 모디 총리(왼쪽)과 스즈키 토시히로 사장이 깃발을 들고 있다. 스즈키 제공

2025년 스즈키 첫 양산형 전기차 ‘e비타라’ 공개 행사에서 인도 모디 총리(왼쪽)과 스즈키 토시히로 사장이 깃발을 들고 있다. 스즈키 제공

1983년 ‘마루티 800’ 탄생과 함께 본격화한 인도 자동차 산업의 이후 성장세는 눈부실 정도입니다. 2025 회계연도(2025년 4월~2026년 3월) 인도에서 판매된 승용차는 무려 464만대. 이제 판매량에서 인도는 세계 3위의 자동차 시장이고요(1위 중국, 2위 미국). 생산 대수에선 중국·미국·일본에 이어 세계 4위입니다.

스즈키의 인도 공장 연간 생산량은 210만대. 일본 내 생산량(99.5만대)의 두배를 이미 넘었고요. 인도에서 생산한 차량이 중남미와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이제 일본까지 수출되고 있습니다. 스즈키는 지난해 발표한 ‘중기 경영계획’에선 2030년까지 인도 내 생산능력을 400만대로 확대할 거라고 밝혔죠. 300만대는 인도 내수 시장, 100만대는 아프리카 등 세계시장 수출용이 될 거라고 합니다. 인도가 스즈키의 가장 중요한 시장이자 글로벌 수출 거점이 되는 거죠.

화려함 대신 ‘딱 좋다’를 팔다

“자동차 산업의 미래 같은 거창한 이야기는 대기업에 물어보라. 스즈키는 하마마츠의 중소기업일 뿐이다.” 인도 시장의 놀라운 성공 뒤에도 고 스즈키 오사무 전 회장은 늘 스즈키를 ‘중소기업’이라고 칭했습니다. 2009년 펴낸 자서전 제목도 ‘나는 중소기업 사장이다’였고요.

이는 단순한 겸손의 뜻이 아닙니다. 기업 규모가 커져도 ‘중소기업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죠. 현 CEO인 스즈키 토시히로 사장 역시 ‘중소기업형 경영’이 스즈키의 중요한 행동 이념이라고 강조하는데요.

스즈키의 중소기업형 경영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 중 하나가 금융 자회사가 없다는 점입니다. 보통 대형 자동차 제조사는 자동차 대출을 취급하는 금융 자회사를 운영하잖아요. 그래야 금융 프로모션으로 판매를 촉진할 수 있으니까요. 스즈키는 그게 없어요. ‘작고 좋은 차를 만든다’는 본업에만 집중하기 위해서죠. 덕분에 스즈키는 자동차 제조사 중 자산수익률(ROA)이 10.73%로 유독 높습니다(2025년 기준). 방대한 자산이 필요한 금융 자회사가 없으니 자산 효율성이 높아질 수밖에요.

스즈키 토시히로 현 사장은 스즈키 오사무 전 회장의 장남으로 2015년 아버지 뒤를 이어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스즈키는 사위가 후계자가 되는 전통이 있었지만, 차기 사장 후보로 꼽혔던 사위 오노 히로타카 전무가 2007년 일찍 사망하면서 장남이 물려받게 됐다. 스즈키 제공

스즈키 토시히로 현 사장은 스즈키 오사무 전 회장의 장남으로 2015년 아버지 뒤를 이어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스즈키는 사위가 후계자가 되는 전통이 있었지만, 차기 사장 후보로 꼽혔던 사위 오노 히로타카 전무가 2007년 일찍 사망하면서 장남이 물려받게 됐다. 스즈키 제공

자체 기술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업계 선두주자와의 제휴에 적극적이란 점도 특징인데요. 스즈키는 1981년엔 미국 제너럴모터스(GM), 2009년엔 폭스바겐과 제휴 관계를 맺었었죠. 물론 폭스바겐이 친환경 기술은 제대로 주지 않고 자회사 취급을 하는 바람에, 둘의 관계는 국제소송전으로 번졌고 결국 파탄 났지만요. 이후 2016년 스즈키 오사무 당시 회장이 직접 도요타 쇼이치로 당시 명예회장을 찾아가 요청하면서 ‘도요타-스즈키 연합’이라는 강력한 동맹이 탄생했고요(도요타가 스즈키 지분 5% 보유). 이제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자율주행 기술 개발과 관련해 두 회사는 공고한 협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결국 강점을 살릴 ‘이길 수 있는 영역’을 택하고 다른 데로 눈 돌리지 않는 지독한 ‘선택과 집중’이 지금의 스즈키를 만든 전략인데요. 그래서 스즈키에 대해선 미래지향적 기술 혁신이 부족하단 비판도 나오지만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작고 가벼운 차를 싸게 잘 만드는 것 자체가 남다른 기술이라고 믿기 때문이죠.

고객 여러분이 ‘딱 좋다’, ‘이걸로 충분해’라고 느낄 수 있는 자동차를 계속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가볍고 안전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호화롭고 복잡한 장비를 피하는 것, 그리고 단순하고 사기 쉬운 가격을 중시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성능이라고 고객이 구매해 주지 않으면 좋은 상품이라 할 수 없으니까요.” (스즈키 토시히로 사장의 2025년 인터뷰) By.딥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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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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