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회가 새롭습니다. 선대 회장(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께서 건설업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첫발을 내디딘 지 50년 만에 자동차 생산기지도 구축하게 됐으니까요.”
2023년 10월 22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사우디 국부펀드(PIF)와의 자동차 공장 합작투자 체결식에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정주영 회장이었다. 50년 전 할아버지가 건설업으로 현대그룹과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운 바로 그 나라에 손자가 ‘제조업의 꽃’으로 불리는 자동차 생산기지를 구축하게 돼서다. 정주영 회장이 1976년 따낸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항만 공사(9억6000만달러) 수주금액은 당시 우리 정부 예산의 4분의 1에 달했다.
◇ 중동 최대 시장에 생산 거점
현대차가 14일(현지시간) 공장 착공식을 연 사우디아라비아는 지난해 신차 84만 대가 팔린 중동 최대 자동차 시장이다. 중동 판매량(249만 대)의 3분의 1이 사우디아라비아 한 나라에서 팔렸다. 현대차가 중동 지역 첫 생산 거점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선택한 이유다. 현대차 사우디아라비아 생산법인(HMMME) 생산 물량은 우선 내수용으로 판매하되 추후 중동과 아프리카 등으로 수출할 계획이다.
현대차는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전년보다 8.7% 증가한 13만5878대를 판매했다. 올해 1분기에는 3만4776대를 팔아 전년에 비해 판매량이 25% 늘었다. 지난 1분기 기준 현대차의 현지 시장 점유율은 16.1%로 도요타(26%)에 이어 2위다. 3위는 기아(8.3%)다. 현대차는 공장 건설 등 현지화 전략을 앞세워 도요타를 따라잡는다는 목표다. 현대차는 중동 전체에서도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현대차는 작년 중동에서 전년 대비 2% 증가한 22만7000대를 판매했다. 1분기에는 6만 대를 팔아 전년에 비해 10.1% 늘었다.
현대차는 중동의 친환경차 시장이 커지고 있다는 판단에 HMMME에서 내연기관차와 전기차를 혼류 생산하기로 했다. 현대차의 1분기 중동 친환경차 판매량은 전년보다 55% 급증한 1만 대를 기록했다. 자동차산업 기반이 없는 현지 사정을 감안해 부품을 해외에서 조달해 조립·생산하는 반제품조립(CKD) 방식을 택했다. 내년 4분기부터 연간 5만대의 내연차·전기차를 생산한다. 공장이 들어서는 킹살만 산업단지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자동차산업 발전을 목표로 조성한 자동차 제조 허브다. 중장기적으로 현지 부품 공급망이 갖춰지면 HMMME의 제조 경쟁력은 한층 높아진다.
◇ 사우디와 수소·에너지 협력 확대
현대차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모빌리티를 넘어 수소·에너지 사업으로 협력을 확대할 계획이다. 현대차가 현지 생산, 판매 등을 총괄하는데도 현지 국부펀드인 PIF에 HMMME 지분 70%를 내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협력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1대주주 자리를 내준 것이다.
이날 착공식엔 반다르 이브라힘 알코라예프 산업광물자원부 장관과 야지드 알후미에드 PIF 부총재 등 거물급 인사들이 참석할 정도로 HMMME에 대한 기대가 높다. 알후미에드 부총재는 “현대차와의 지속적인 파트너십을 통해 사우디 모빌리티 생태계 성장을 가속화하겠다”고 강조했다. 장재훈 현대차그룹 부회장도 “HMMME는 현대차와 사우디아라비아 모두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며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미래 모빌리티와 기술 혁신의 새로운 장을 열 것”이라고 화답했다.
김보형 기자 kph21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