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결제은행(BIS) 주도 프로토타입 공개
KB·신한·하나·우리·NH·IBK 등 6곳 참여
토큰화 기반 실시간 동시 결제 구현
중앙은행·상업은행 통합 원장 구축
국제결제은행(BIS) 주도로 한국은행 등 7개국 중앙은행과 민간은행 40여곳이 2년간 개발해온 국경 간 도매결제 플랫폼 ‘프로젝트 아고라(Project Agorá)’ 프로토타입이 처음 공개됐다.
27일(현지시간) BIS와 국제금융협회(IIF)는 ‘프로젝트 아고라’ 결과 보고서를 발표하고 향후 일부 통화와 참여 기관을 대상으로 실제 자금을 활용한 거래 테스트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민간 부문의 역할을 확대하고 신규 참여 기관을 추가로 모집할 예정이다.
프로젝트 아고라는 상업은행의 예금과 중앙은행의 지불준비금을 토큰화해 단일한 프로그래머블 플랫폼(Programmable platform)에서 통합 운영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민관 협력 사업이다.
프로젝트 아고라에는 한국은행을 비롯해 뉴욕 연방준비은행, 영란은행, 프랑스은행(유로시스템 대표), 일본은행, 멕시코은행, 스위스 국립은행 등 7개 주요국 중앙은행과 40개 이상의 민간 금융기관이 참여했다. 이날 BIS는 캐나다 중앙은행까지 추가로 합류한다는 소식도 발표했다.
국내 은행권에서는 KB국민은행, 신한은행, 하나은행, 우리은행, NH농협은행, IBK기업은행 등 6곳이 참여 금융기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해외에서는 JP모건 체이스, UBS, 도이체방크, HSBC, BNP파리바, 씨티, 스탠다드차타드, 미즈호은행, MUFG 등 글로벌 대형 은행들과 마스터카드, 비자, 스위프트, 유로클리어 등 국제 결제 네트워크가 참여했다.
오늘날의 국경 간 결제는 여러 중개 기관을 순차적으로 거쳐야 하는 환거래 은행(Correspondent banking) 구조에 의존하고 있어 속도가 느리고 비용이 많이 들며 투명성이 떨어진다는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BIS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경 간 결제 규모는 195조달러에 달하고 오는 2032년에는 320조달러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낡은 국경 간 지급결제 구조는 각국 결제 시스템의 운영 시간 불일치, 데이터 품질 저하, 순차적 자금 처리로 인한 유동성 묶임 현상 등은 글로벌 무역과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병목현상으로 지목되어 왔다.
아고라 프로젝트는 이러한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해 분산원장기술(DLT)과 스마트 컨트랙트를 활용한 아키텍처를 제시했다.
이 시스템은 상업은행의 토큰화된 예금이 기록되는 ‘통합 원장(Unifying ledger)’과 각국 중앙은행의 토큰화된 지불준비금이 기록되는 ‘관할권 원장(Jurisdictional ledger)’이라는 두 개의 계층형 구조로 설계됐다.
이를 통해 각국 중앙은행은 국가 통화 및 운영에 대한 자율성과 통제력을 유지하면서도 상호 운용 가능한 단일 플랫폼의 이점을 누릴 수 있다.
아고라 프로토타입의 가장 핵심적인 혁신은 ‘원자적 결제(Atomic settlement)’의 구현이다.
기존 시스템에서는 결제 정보 교환과 자금의 이동이 분절되어 순차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거래 중간에 오류가 발생하면 자금을 다시 회수해야 하는 신용 및 결제 위험이 존재했다.
반면 아고라 프로젝트는 자금을 확정(Locking)하기 전에 결제 관련 정보와 컴플라이언스 승인을 미리 조율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결제 과정은 수취인 확인(Confirmation of payee), 경로 탐색(Path discovery), 자금세탁방지(AML) 및 제재 검토 등을 포함한 검증(Validation), 자금 동결(Locking), 결제(Settlement)라는 5단계의 엔드투엔드(E2E) 수명 주기를 따른다.
이 과정을 통해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만 여러 통화와 관할권에 걸친 결제가 ‘전부 아니면 전무(All-or-nothing)’ 방식으로 동시에 실행되며 결제 위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이 구조의 핵심은 기존 국경 간 결제가 ‘정보’와 ‘자금 이동’을 순차적으로 처리했던 것과 달리, 두 가지를 분리해 정보 처리를 먼저 완결한 뒤에만 자금을 이동시킨다는 점이다. 결제 실패 후 거래를 되돌리는 데 드는 비용이 줄어들 수 있다.
안드레아 매클러 BIS 부총재는 “거래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사전에 확인되면, 관련된 모든 잔액을 한 번에 일괄 결제한다”고 설명했다.
아고라 프로토타입이 민간 스테이블코인 진영의 블록체인 결제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기존 환거래 은행(correspondent banking) 체계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BIS는 환거래 은행을 “글로벌 결제의 근간”이라고 재확인했다. 아고라는 기존 제재 심사와 자금세탁방지 체계를 온존시키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프로젝트 아고라는 금융권의 핵심 가치인 프라이버시 보호와 규제 준수를 위한 기술적 안전장치도 마련했다.
프로토타입은 ‘팔라딘(Paladin)’이라는 프라이버시 프레임워크를 적용해, 토큰 잔액·거래 정보를 암호화 방식으로 처리한다. 각 기관은 자신이 관여한 결제 단계에 관한 정보만 볼 수 있으며, 공유원장에는 최소한의 증명 데이터만 기록된다.
시스템은 노토(Noto) 토큰 프라이버시 모델과 펜테(Pente) 워크플로우 프라이버시 기술을 결합하여 데이터를 다층적으로 보호한다. 거래 잔액이나 민감한 고객 정보는 원장에 직접 노출되지 않으며, 오직 암호화된 식별자와 승인 결과만이 기록된다.
각 민간 금융기관은 자사의 내부 시스템에서 독립적으로 자금세탁방지 및 제재 대상자 스크리닝을 수행한 뒤 그 결과만을 공유함으로써 데이터 프라이버시를 완벽히 보호하는 동시에 플랫폼 차원의 규제 준수 요건을 충족시킨다. 중앙 집중화된 데이터 공유 없이도 신뢰할 수 있는 결제망을 구축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법률적 타당성 검토 역시 프로젝트 아고라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다.
BIS는 아고라 플랫폼에서 발행되는 토큰화된 지불준비금과 예금은 기존의 전통적인 계좌 기반 화폐와 동일한 법적 특성을 지니는 것으로 확인했다.
보고서는 토큰화라는 기술적 변화가 화폐의 법적 특성이나 관련 의무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며 참여한 7개 관할권 모두에서 기존 법률 프레임워크 내에 ‘결제 완결성(Settlement finality)’을 달성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향후 상용화를 위해서는 각국의 법적 체계에 가장 잘 부합하는 기술적, 운영적, 계약적 요구사항을 세밀하게 정의하는 추가 작업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아직 상용화를 위해 풀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보고서는 사이버보안, 운영 복원력, 처리 성능, 기존 실시간총액결제시스템(RTGS)과의 연동, 국가별 데이터 지역화 규정 준수 등을 향후 개선 과제로 열거했다.
특히 한국은 개인신용정보 및 고유식별정보의 해외 보관을 금지하는 규정이 있어 국내 기관의 참여 확대 시 데이터 거버넌스 설계가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행의 경우 BIS 경제보좌관 겸 통화경제국장 출신인 신현송 신임 총재 체제에서 아고라 프로젝트와 국내 ‘프로젝트 한강’이 디지털화폐 정책의 양대 축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크다.
신 총재는 BIS 재직 시절 ‘통합원장’ 개념 형성에 직접 기여한 인물로 프로젝트 심화에 적극적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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