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지난달 28일 야당이 강행 처리한 양곡관리법 등 6개 법안에 대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할지를 두고 막판까지 고심하는 것으로 16일 알려졌다. 17일 국무회의에는 법안을 상정하지 않기로 가닥을 잡았지만 거부권 행사 시한이 오는 21일인 만큼 아직은 숙고할 시간이 남아 있다. 이들 6개 법안은 윤석열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지 않았다면 거부권을 행사했을 게 확실한 법안이지만, 한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사용하면 야당이 탄핵 카드를 들고나올 가능성이 커 딜레마가 커진 상황이다. 야당 일각에서는 일부 법안은 정권이 바뀌면 부메랑으로 돌아올 우려가 있어 한 권한대행의 거부권 행사를 묵인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번주 임시국무회의 열 듯
이들 법안은 양곡관리법,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농안법), 농어업재해대책법, 농어업재해보험법 등 농업 4법 개정안과 국회법·국회증언감정법 개정안이다.
양곡관리법은 쌀값이 떨어지면 정부가 남는 쌀을 의무적으로 사들이도록 하는 법이다. 정부는 쌀의 구조적 과잉 생산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반대해왔다. 농안법도 일부 품목에 대한 ‘최저가격 보장제도’를 담고 있어 농작물의 생산 쏠림 현상을 우려하고 있다. 재해보험법과 재해대책법도 도덕적 해이를 일으킨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국회법 개정안은 국회의 예산심사 법정 기한이 지나도 다음해 정부 예산안과 예산 부수 법안이 본회의에 자동으로 부의되지 않게 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국회 증감법은 기업인을 언제든 국회로 호출하고 기업 기밀이 담긴 서류를 무조건 공개하도록 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애초 정부와 정치권에선 한 권한대행이 17일 국무회의에서 이들 법안을 상정한 뒤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국무회의 상정 자체를 미룬 것은 거부권 행사 여부를 더 고심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행사 시한인 21일까지 정치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번주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이들 안건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 관계자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제안한 국정안정협의체 구성 논의를 지켜보며 막판까지 고심을 거듭할 것”이라고 했다.
○일단은 거부권 행사 유력
현재로서는 한 권한대행이 결국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란 시각이 우세하다. 이들 법안 모두 시장원리에 반하고 산업 경쟁력을 떨어뜨릴 우려가 있어서다. 이런 이유로 주무 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와 기획재정부를 비롯해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지난 13일 윤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요청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기간에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이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보상에 대한 특별법’과 ‘사면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전례도 있다.
한 권한대행으로선 거부권을 행사하면 야당과의 협력이 사실상 어려워지는 것이 부담이다. 민주당이 한 권한대행을 향해 탄핵 카드를 재차 꺼내 들며 압박 수위를 높일 가능성도 크다.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은 이날 국회에서 “권한대행에겐 인사권과 법률 거부권을 행사할 능동적 권한이 없다”고 했고, 전현희 최고위원은 “권한대행으로서 정치적 중립성을 무시하고 입법 거부권과 인사권을 남용하는 것은 헌법 위반으로 또 다른 탄핵 사유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고 했다.
민주당이 한 권한대행까지 탄핵하는 건 정치적으로 부담이 크다는 분석도 있다. 국정 혼란을 더 키울 경우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우려가 많은 일부 법안에 대해 거부권 사용을 용인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일부 당직자는 국회 증감법의 악영향을 크게 우려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경우에는 여당의 강한 반발이 예상된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힌 것은 맞다”면서도 “정치 상황이 워낙 시시각각 변해 결과를 가늠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양길성/박상용 기자 vertig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