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도 패밀리오피스가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다. 기업 매각을 통해 상당한 부를 거머쥔 기업인들이 투자회사를 설립해 자신과 가족의 부를 관리하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형 패밀리오피스의 효시로는 에이티넘파트너스가 꼽힌다. 설립자인 이민주 회장이 2008년 종합유선방송사 씨앤엠을 매각해 마련한 1조5000억원의 자금을 토대로 설립됐다. 벤처캐피털(VC)인 에이티넘인베스트의 최대주주로 국내 VC 시장의 주요 플레이어로 부상했다.
2017년 화장품업체 카버코리아를 유니레버에 넘긴 이상록 회장도 매각대금 1조원을 바탕으로 투자회사를 설립해 문화·콘텐츠 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일진머티리얼즈를 롯데그룹에 매각한 허재명 전 사장은 2023년 투자전문회사인 컴퍼니에이치를 설립해 2조원 규모 자금을 운용하고 있다.
이들 투자사는 특정 개인 및 가문의 자금을 운용한다는 점에서 패밀리오피스에 속한다. 하지만 한국에는 패밀리오피스에 대한 별도의 법적 기준이 없어 사모투자회사나 벤처투자회사 등으로 등록해 특정 분야에만 제한된 투자 활동을 영위하고 있다. 제도상 회사 명의의 기부나 사회공헌 활동 범위도 한정돼 있다는 점에서 싱가포르 등의 패밀리오피스와 다르다.
여러 초고액 자산가의 자금을 모아 운영하는 멀티(multi) 패밀리오피스 사업은 삼성증권이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있다. 1000억원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가족 120곳이 가입해 출범 5년 만에 운용자산 30조원을 달성했다. KB증권과 NH투자증권, 신한투자증권 등도 예탁자산 100억~300억원을 기준으로 초고액 자산가를 적극 유치하고 있다.
예탁자산이 10억~20억원인 고객을 대상으로 하던 프리미엄 프라이빗뱅킹 서비스를 넘어 폭넓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패밀리오피스 고객은 상당한 규모의 자본을 장기간 투자할 수 있어 자본시장에서 기관투자가와 같은 대접을 받는다”며 “그만큼 투자할 수 있는 대상도 다양하다”고 전했다.
대부분의 초고액 자산가가 기업을 거느리고 있는 만큼 투자은행(IB) 부서와 적극 협업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기업공개(IPO)와 인수합병(M&A) 자문, 유망 기업에 대한 투자건 중계, 자금 조달 등이 패밀리오피스 서비스에 포함된다.
최순영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금융사들의 적극적인 패밀리오피스 사업 개척은 초고액 자산가들이 국내에서 자금을 운용할 선택지가 늘어나는 효과로 이어진다”며 “자산 해외 이전 움직임을 줄이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