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은 한국 영화 산업에 치명적이었다. 극장 관객 수는 반 토막 났고, 투자·배급 라인은 얼어붙었다. OTT의 급격한 부상 속에서 제작사들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고, "K-영화의 전성기가 끝난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흘러나왔다. 그러나 북미 최대 영화제인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TIFF)는 그러한 불안에 반박을 내놓았다. 여러 편의 한국 영화가 초청돼 관객과 평단의 환호를 받으며, "한국 영화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 박찬욱 '어쩔수가없다'에 열광…이병헌 특별 공로상 수상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앞서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9분간 기립박수를 이끌어내며 세계 영화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작품은 토론토에서도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초청됐다.
프리미어 상영 직후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가 이어졌고, 박 감독은 "처음 본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한 부분까지 울고 웃으며 반응해 주셔서 뿌듯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주연 이병헌도 "극장 안이 열광적인 반응으로 가득했다"며 감격스러움을 드러냈다.
관객들의 평가도 후했다. 한 평론가는 "박찬욱 감독 특유의 영리한 영화적 묘기가 곳곳에 살아 있다. 배우들의 연기는 압도적"이라고 극찬했다. 또 다른 평론가는 "촘촘하게 쌓인 블랙코미디와 날카로운 편집, 상징적 이미지가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한다"고 전했다.
특히 이병헌은 토론토 현장에서 영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TIFF 트리뷰트 어워즈’ 특별공로상도 수상했다.
'어쩔수가없다'는 북미와 유럽, 일본 등 200여 개국에 선판매가 확정되며 박 감독의 전작 ‘헤어질 결심’(192개국)을 넘어섰다. 이미 선판매 수익으로 마케팅·홍보 등의 비용을 제외한 '어쩔수가없다' 순 제작비는 충당된 것으로 알려졌다.
오는 24일 국내 개봉을 앞둔 '어쩔수가없다'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아시아 최초 공개를 앞두고 있다.
◆ 박정민 ‘얼굴’, 날카로운 미스터리로 호평
연상호 감독이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연출한 영화 '얼굴'은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됐다. 시각장애인 전각 장인 아버지와 아들이 40년 전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내용으로, 박정민이 1인 2역을 소화했다.
외신 반응은 뜨거웠다. 스크린 데일리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영리한 메시지의 미스터리"라고 평했으며, 어워즈워치는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는 드라마"라고 호평했다. 아시안 무비 펄스는 "박정민의 세련된 연기가 두 캐릭터를 풍부하게 살린다"고 리뷰했다.
연상호 감독은 "박정민은 토론토의 저스틴 비버"라고 농담을 던지며 "1800석 극장이 가득 차 영화를 보는 기쁨이 되살아났다"고 말했다. 박정민 역시 "현장에서 동포들의 힘을 크게 느꼈다. 혹시 이 기사를 볼 비버 선생님께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다"며 웃음을 자아냈다.
'얼굴'은 연상호 감독의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총 13회차 촬영, 일반 장편 영화의 4분의 1 수준의 제작 기간으로 완성됐다. 주연배우 박정민은 노개런티로 참여했으며 다른 배우들도 러닝 개런티 방식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얼굴'은 이미 북미를 포함한 157개국에 선판매됐고, 한국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흥행 청신호를 켰다.
◆ 넷플릭스 '굿뉴스', 변성현 감독X설경규 조합 어게인
변성현 감독의 신작 '굿뉴스'는 1970년대 납치된 비행기를 둘러싼 소동극을 다룬 작품으로, 설경구·홍경·카사마츠 쇼 등이 출연했다.
월드 프리미어 상영에는 영화를 연출한 변성현 감독과 정체불명의 해결사 아무개 역의 설경구, 엘리트 공군 중위 서고명 역의 홍경, 공산주의 무장단체의 리더 덴지 역의 카사마츠 쇼가 참석했다.
지오반나 풀비 토론토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이 영화에 대해 "아찔한 반전과 다채로운 캐릭터들의 향연. 변성현 감독이 가진 영화적 무기를 총동원한 짜릿하게 즐거운 여정"이라고 극찬했다.
스크린 데일리는 "변성현 감독의 가장 야심 찬 작품이자 엄청나게 웃기고 기막히게 기발한 풍자극"이라며 "광기 어린 사건들 속에서 배우들은 섬세하게 조율된 호흡으로 완성된 환상적이고 다층적인 연기를 선보인다"고 평가했다.
'굿뉴스'는 오는 10월 17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 '여덕' 생성 예정…한소희·전종서의 투톱 활약 '프로젝트Y'
이환 감독의 '프로젝트 Y'도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초청됐다. 이 영화는 밑바닥 현실을 벗어나려는 두 여성이 검은 돈과 금괴를 훔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프리미어 상영에 앞서 이환 감독과 배우 한소희, 전종서는 영화제 팬들의 뜨거운 환대와 플래쉬 세례 속에 레드카펫에 등장했다. 국내 뿐만 아니라 글로벌 스타로 활약하고 있는 한소희, 전종서의 등장만으로도 현장의 열기가 뜨겁게 고조됐다. 이들은 환한 미소와 함께 팬들의 사인 요청과 사진 촬영에 응대하며 친밀한 시간을 가졌다.
이환 감독은 "한소희, 전종서 두 배우는 현재 수많은 대중의 지지를 받는 시대의 아이콘이기 때문에 꼭 함께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한소희는 "대본이 너무 재밌었고 같은 또래의, 같은 성별의 두 배우가 한 영화의 한 프레임에 담기는 것이 흥미롭게 느껴졌다"고 영화 출연 이유를 밝혔다. 전종서는 "같은 나이의 동료 여자 배우, 좋은 시나리오, 좋은 감독님, 좋은 제작진 등 모든 상황이 좋은 환경으로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있는데, 그런 촬영을 같이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꼭 참여하고 싶었다"고 거들었다.
'프로젝트Y'는 토론토영화제에 이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후 국내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 '세계의 주인', 韓 영화 유일 플랫폼 경쟁 부문 초청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은 한국 영화 중 유일하게 이번 영화제 플랫폼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여고생 주인이 홧김에 내뱉은 한마디로 주변의 세계가 흔들리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우리들', '우리집'을 연출한 윤 감독이 6년 만에 발표한 신작이다.
이번 영화제엔 윤 감독과 주인공 주인 역을 맡은 신인배우 서수빈, 엄마 태선 역을 맡은 장혜진이 참석했다. 서수빈은 경이로운 연기력으로 찬사를 받았고, '기생충'으로 세계 영화 팬들의 눈도장을 받은 장혜진은 현장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한국 영화의 밤 등 영화제 행사에서 연상호 감독은 '세계의 주인'에 대해 "보법이 다른 윤가은 감독님의 걸작"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박정민은 "엄청난 것이 나와버림"이라는 궁금증을 더하는 감상을 남겼다.
지오바나 풀비 프로그래머는 "청소년기 성장통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내밀한 가족관계 속에서 단단하게 회복력과 주체성을 찾아가는 개인의 여정을 깊이 있게 그려냈다"고 평했다.
'세계의 주인'은 오는 10월 한국 관객을 만난다.
◆ 한국계 신예 창작자 지원 'K스토리 펀드'
올해 토론토국제영화제는 한국 영화가 단순히 "위기를 극복했다"는 차원을 넘어, 글로벌 시장 재편 속에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이번 영화제 기간에는 영화진흥위원회, CJ문화재단, TIFF가 공동 출범한 글로벌 창작 지원 프로그램 'K 스토리 펀드' 시상식이 개최됐다. 행사에는 민희경 CJ사회공헌추진단장, 김영재 주토론토총영사관 총영사, 김성열 주캐나다한국문화원장, 아니타 리 TIFF 수석프로그래머, 제프 맥노턴 TIFF 부사장 겸 리드 프로그래머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K-스토리 펀드는 북미 지역 한국계 창작자들의 첫 장편 혹은 두 번째 장편 개발을 지원하는 유일한 제도다. 수상자에게는 4개월간의 집중 멘토링과 1만 캐나다달러의 지원금이 수여되며, 시나리오 개발 단계부터 글로벌 네트워킹까지 폭넓게 지원한다. 한국계 신예 창작자들이 세계 무대로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는 K-스토리 펀드는 한국영화가 단일 국가의 성과를 넘어 글로벌 영화산업과 협력하며 성장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올해 최종 수상자로는 지원 리, 테일러 상현 리, 제롬 유 3인이 선정됐다. 수상자들은 각자의 서사를 통해 한국적 뿌리와 글로벌 정체성을 연결하며 창작 의지를 드러냈다.
영진위 관계자는 "K-스토리 펀드는 단순한 지원 프로그램이 아니라, 한국영화가 세계와 협력하고 미래 세대의 창작을 돕는 문화적 선언"이라고 강조했다.
또 "이번 시상식은 한국 콘텐츠의 글로벌 경쟁력을 실제로 보여준 상징적인 무대였으며, K-스토리 펀드를 통한 창작자 지원도 큰 의미를 지닌다. 앞으로도 영진위는 세계 무대에서 한국영화의 지속적인 성장과 교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