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위기 속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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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위기 속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

요즘 우리 사회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는 단어를 자주 이야기한다. 고난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힘이라는 의미를 넘어, 위기 속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유연함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이는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쌓아 올리는 태도의 축적과 일상화된 훈련에서 비롯된다. 평온한 일상 뒤에 깃든 수고와 노력은 대부분 조용히 가려져 있다. 지하철이라는 공간도 마찬가지다. 매일 수천 번 운행되는 지하철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이 능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우리는 실감하지 못한다.

지난주 발생한 서울 지하철 5호선 방화 사건은 지하철의 회복탄력성을 보여주는 중대한 장면이었다. 방화범은 400여 명의 승객이 타고 있는 열차에 고의로 불을 질렀다. 연기는 순식간에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20여 년 전 충격과 비통함을 남기며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대구 지하철 화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재난은 예고 없이 들이닥쳤지만, 그에 맞선 태도는 결과를 갈랐다.

소화 약제와 뒤섞인 연기 속에서 시민들은 언젠가 열차에서 본 화재 대피 안내 영상을 다급히 떠올렸을 것이다. 출입문 바로 옆 비상 코크를 돌려 출입문을 열고, 침착하게 터널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염의 공포 앞에서도 시민들은 서로를 먼저 살폈다. 몸이 불편한 노인 등에게 먼저 길을 내주며 배려와 연대를 실천했다. 일부 승객은 기관사와 함께 남아 손에 쥔 소화기로 불길에 맞섰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위기 앞에 등장한 평범한 영웅들은 터널을 가득 메운 불안을 껴안으며 묵묵히 길을 밝혀나갔다.

기관사에게 위기는 낯설지 않았다. 불과 한 달 전, 훈련을 통해 연기가 발생했을 때 소화 조치부터 연기로 차량이 멈출 경우 취해야 할 긴급 처치까지 모든 과정을 익힌 덕분이었다. 서울교통공사는 재난 상황을 가정한 모의 훈련을 꾸준히 이어왔다. 방화뿐 아니라 탈선, 테러 등 다양한 시나리오에서 직원들은 ‘만일의 상황’을 몸에 새겼다. 그렇게 반복된 훈련은 실제 방화 현장에서 유효하게 작동했다. 혼란 대신 질서가, 혼동 대신 준비가 발휘됐다.

대구 지하철 사고 이후 꾸준히 개선해온 열차 내장재도 그 진가를 드러냈다. 대피가 곤란하거나 불가능한 상황을 대비해 의자 시트, 벽체, 바닥재 그리고 손잡이 등을 과감하게 불연성·난연성 소재로 모두 교체해 불길 확산을 사전에 막아섰다.

이번 사고는 우리의 대응이 아직 완벽하지 않음을 일깨우기도 했다. 만약 열차 CCTV가 관제센터와 실시간으로 연결됐다면, 기관사 한 명에게 의존하지 않고 더 신속하고 유기적인 대응이 가능했을 것이다. 기술적 대안이 분명 존재하지만 천문학적 예산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수년째 첫걸음조차 떼지 못한 현실이 아쉬움을 남긴다. 안전이 필요한 곳에는 더 과감한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 ‘재난은 기억하지 않으면 의미를 잃고, 투자하지 않으면 되풀이된다’는 교훈을 다시 생각해 보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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