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변에서 꿈꾸는 ‘대동강의 기적’… 김성철 코넥신 대표의 꿈[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2 days ago 13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탈북해 서울대를 졸업하고 정보기술(IT) 업체 대표로 활동하는 김성철 씨.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탈북해 서울대를 졸업하고 정보기술(IT) 업체 대표로 활동하는 김성철 씨.
어렸을 때 그는 가족이 왜 남의 집 창고에서 살고 있는지 몰랐다. 나중에 들으니, 그가 한 살 때인 1989년 동독에 유학 갔던 외삼촌이 탈북해 남조선에 가는 바람에 집을 빼앗겼다고 했다.

그가 외삼촌이 탈북하기 1년 전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의 어머니 운명도 어찌 됐을지 알 수가 없다. 북에선 ‘시집간 딸은 친정 식구가 아니라 남’이라는 봉건적 출가외인 원칙이 연좌제에 적용된다. 만약 당시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했다면 어머니는 어디론가 끌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버릴 수가 없었다.

대신 아버지는 큰 대가를 감수했다. 평생 ‘반동의 매부’로 살며 출세를 할 수 없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 같은 동네 남의 집 창고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1990년 남동생도 태어났다.

그때로부터 3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김성철 씨(38)는 지금 한국에서 서울대를 나와 인공지능(AI)를 활용하는 정보기술(IT) 업체 대표로 살고 있다. 동생도 한국에서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됐다. 한때는 저주 받았던 운명이 축복으로 바뀌었다.

김성철 씨가 탈북민 대안학교인 다음학교를 찾았다. 이 학교는 김 씨의 회사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러 거래처 중 하나이기도 하다.

김성철 씨가 탈북민 대안학교인 다음학교를 찾았다. 이 학교는 김 씨의 회사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러 거래처 중 하나이기도 하다.

● 공부만이 살길이었다

김 씨의 기억은 ‘고난의 행군’ 때인 1995년경부터 시작된다. 그의 고향 남포시 강서구역은 평양과 남포의 중간에 있다. 강서에선 예로부터 유명한 인물이 많이 배출됐는데, 대표적으로 도산 안창호와 고당 조만식,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 노신영 전 국무총리 등이 있다.

논밭이 많고 바다도 가깝고 대도시들을 끼고 있어서 그런지 강서에선 고난의 행군 때 굶어 죽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김 씨 아버지는 돼지 목장 작업반장을 지냈다.

인민학교(소학교·한국의 초등학교) 시절 김 씨는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고 학업에 열중했다. 그가 살던 동네엔 아이가 많았다. 인민학교 한 학년에 13개 학급, 400여 명이 있었다. 이는 주변에 강서뜨락또르공장이란 큰 기업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업소엔 트랙터를 만드는 공장과 탱크를 만드는 군수공장이 함께 있다.그의 외할아버지는 뜨락또르공장 직장장을 지냈다. 외할아버지는 해방 후 북한 공군을 창설한 주역 중 한 명이었고 비행 대대장과 비행협회 부회장까지 지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이른바 ‘종파 사건’때 해임되고 평양에서 추방돼 뜨락또르공장 기술자로 강등됐다. 김일성과 빨치산 활동을 함께 했던 인물들도 종파로 몰려 숙청돼 사라지던 때에 그렇게라도 살아남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인민학교를 졸업해 중학교로 올라가야 할 시기인 1999년, 마침 북한 당국은 전국 각 군과 구역에 1고등중학교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1고등중학교는 도나 특별시에 하나씩만 있었는데, 이때부터 북한 200여 개 군과 구역마다 하나씩 생긴 것이다.

1고등중학교가 만들어진다는 말에 인민학교 성적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머리 좋은 유전자를 타고났는지 김 씨는 졸업생 400명 중 1고등중학교에 입학한 6명에 들었다. 출신성분이 나빠도 성적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다.

김성철 씨(모니터 오른쪽)가 올해 2월 개최한 사업 설명회에서 코넥신이 개발 중인 솔루션을 설명하고 있다.

김성철 씨(모니터 오른쪽)가 올해 2월 개최한 사업 설명회에서 코넥신이 개발 중인 솔루션을 설명하고 있다.

● 무너진 대학의 꿈

영웅강서제1고등중학교는 구역 각 인민학교에서 시험을 쳐서 60여 명을 뽑았다. 입학하고 1년쯤 지나니 권력자 자녀들이 각종 명목으로 슬그머니 입학해 80여 명이 됐다.지역별 1고등중학교끼리 경쟁했기 때문에 선생들은 학생들을 엄격하게 가르쳤다. 성적이 꼴찌인 학생은 퇴학당했다. 김 씨는 수학과 컴퓨터에서 두각을 나타내 컴퓨터 소조에도 들어갔다. 소조는 학년별로 성적 좋은 학생 서너 명을 모아 놓은 특별 팀이라고 할 수 있다.

운영체제(OS)로 윈도98을 쓰는 컴퓨터를 다루며 그는 코딩도 배우고 게임 테트리스 프로그램도 직접 만들어 봤다. 4학년 때엔 전국청소년프로그램대회에 나갔지만 성능이 훨씬 좋은 프로그램으로 배운 대도시 학생들을 넘기는 어려웠다.

북한답게 수학이나 프로그램 응용 문제는 늘 전투적이었다. 가령 ‘적의 미사일을 A 탐지기는 4초 만에 발견하고 B 탐지기는 6초 만에 발견했는데, 포탄의 궤적을 계산하고 요격미사일을 몇도 각도로 발사해야 하는가’ 같은 식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 2005년 1고등을 졸업할 당시 성적으로는 전교 3등 안에 들었다. 하지만 졸업할 때가 돼서야 그는 비로소 출신성분이 나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됐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당연히 좋은 대학에 추천받았다. 그도 좋은 대학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졸업생 면담 때 당에서 나왔다는 사람이 그를 불러 “너는 당에 충성하는 것이 우선이다. 군대에 나가 충성심을 보여라”라고 했다. 그렇게 그의 앞길은 결정됐다. 대학에 가지 못하고 군대에서 10년을 보낼 생각에 심란했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부모님은 놀라지 않았다.

그가 입대한 부대는 7총국. 북한군 산하 전문 건설 부대로 평양에 본부가 있었다. 그 부대에서 집까지는 차로 불과 2시간 정도 거리였다.

지난해 가을 강원도 강릉으로 여행을 가 오죽헌을 찾은 김성철 씨가 율곡 이이 초상 앞에 서 있다.

지난해 가을 강원도 강릉으로 여행을 가 오죽헌을 찾은 김성철 씨가 율곡 이이 초상 앞에 서 있다.

● “성철아, 외국 가자”

그가 공부에 열심인 학생으로 사는 동안 집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고난의 행군 때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한 어머니는 사람까지 고용할 정도로 성공했다. 그가 1고등에 다닐 땐 창고 신세에서 벗어나 큰 집도 샀다.

장남이 군에 가게 됐을 때 부모님이 놀라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이미 북한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아들이 어디에 있건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입대한 김 씨는 신의주 신병훈련소에서 3개월 훈련을 받았다. 처음 사흘은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도정이 잘 되지 않은 쌀로 지어 밥에 쌀겨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신병들이 먹는 밥에는 힘들다고 기름과 설탕을 한 숟가락씩 넣어주었는데, 설탕 뿌린 밥을 먹는 것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당시 기름과 설탕을 준다는 것 자체가 다른 부대에 비하면 얼마나 큰 특혜인지 알지 못했다.

그럭저럭 신병 훈련을 마치고 평양의 부대에 배속됐지만 집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다. 그렇게 군 생활을 한 지 1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김 씨는 2006년 3월 8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저녁에 어머니가 평양으로 그를 찾아왔다.

“성철아. 우리 가족이 다 외국에 가자. 아버지와 동생도 동의했다. 내일 떠날 거야.”

갑작스러운 얘기에 그날 밤 그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어릴 때 외국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꿈이 현실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부모님에게서 들었던 “일본은 우리보다 100년 발전했고 남조선은 50년 더 발전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발전된 나라에 가서 살고 싶었다.

한편으론 ‘1고등에서 내가 첫 배신자가 되겠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너무 마음에 걸렸다.

김성철 씨가 자신의 회사에서 여러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 해솔직업사관학교를 찾은 모습.

김성철 씨가 자신의 회사에서 여러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 해솔직업사관학교를 찾은 모습.

● 가족을 노린 보위부의 덫

이튿날 아침 평양역에서 강서에서 온 아버지와 동생을 만났다. 국경 지역으로 가는 여행증은 어머니가 이미 다 만들어 두었다. 김 씨 가족과 그들을 안내하는 50대 여성 브로커까지 모두 다섯 명이 나진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김 씨는 빡빡 깎은 군인 머리를 감추기 위해 털모자를 썼다.

나진까지 도착하는 3일 내내 김 씨 가족은 엄청나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탄 기차는 러시아로 가는 국제 열차를 달고 있어 입석이 없도록 관리되는 열차였다.

어머니와 김 씨가 창가에 앉고 어머니 앞에 브로커가 앉았다. 김 씨 앞에 앉은 사람은 상좌(중령) 군복을 입은 군관이었다. 그 군관은 자신을 7총국 정치위원이라고 소개했다. 탈북하는 때에 하필 자기 부대 정치위원과 마주 앉아 가게 된 것이다. 물론 7총국 병사가 1만 명은 넘으니 정치위원이 말단 신병을 알 순 없을 듯했다.

아버지와 동생이 앉은 좌석도 맞은편에 군관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그 칸에는 군인이 많지 않았는데 하필 김 씨 가족 앞에만 군관들이 있었다.

정치위원에게 신분을 들키지 않으려고 김 씨는 3일 내내 모자를 벗지 않았다. 나진에 도착해 내릴 때 정치위원은 “3일 내내 모자 안 벗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했다. 나진역에 내리니 그제야 긴장이 풀려 숨이 쉬어졌다. 김 씨는 지금까지도 자신의 가족 앞에 군관들이 앉았던 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적인 것인지 알지 못한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의 가족이 탈북한다는 것을 보위부는 알고 있었다. 김 씨가 군에 있을 때 장사 핑계로 국경 지역을 오가던 어머니가 마침내 한국에 앞서 간 동생과 연결이 되는 데 성공했다. 브로커는 동생이 소개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 브로커 딸의 남자친구가 하필 보안원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브로커 딸은 남자친구에게 자신의 어머니가 강서에 가서 일가족 4명을 탈북시키려 한다는 정보를 넘겨줬다. 보위부는 김 씨 가족을 감시하다가 강을 넘을 때 현행범으로 체포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그것도 모르고 나진까지 무사히 왔다고 안도한 김 씨 가족은 브로커를 따라 화물차를 타고 두만강 인근으로 몇 시간 동안 이동했다. 그들이 브로커를 따라 들어간, 두만강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집도 보위부가 감시하고 있던 곳이었다.

김성철 씨가 2024년 아들과 함께 자신의 가족이 사는 동네를 산책하고 있다.

김성철 씨가 2024년 아들과 함께 자신의 가족이 사는 동네를 산책하고 있다.

● 일주일 만에 서울 도착

하늘이 도왔다. 그들 가족은 원래 밤에 두만강을 넘기로 경비를 서던 군인들과 이야기가 돼 있었다. 그런데 김 씨 모친에게 뭔가 이상한 촉이 왔다. 나중에 모친은 “느낌이 싸해서”라고 표현했지만, 가족의 목숨을 책임진 비상한 모성의 발로였지 않았을까.

모친이 우겨서 가족은 이른 저녁에 두만강을 넘었다. 보위부는 뇌물을 받고 이들을 안내할 국경경비대 군인들이 누구인지는 몰랐던 것 같다. 경비대원 두 명이 그들 가족을 안내해 얼어붙은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데려다줬다. 중국 도로엔 대기시켜 둔 택시 두 대가 있었다.

택시로 5시간을 달려 어느 집에 들어갔다. 중국 브로커가 마중 나왔다. 그는 “당신들이 떠나자마자 보위부가 북한 브로커 집을 급습했다. 안내해 준 군인들도 체포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튿날 이들은 기차를 타고 대련으로 갔다. 거기서 가짜 여권을 만들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모두가 먼저 탈북한 김 씨 외삼촌이 치밀하게 설계한 덕분이었다.

인천공항에 내린 날은 2006년 3월 16일 저녁이었다. 평양을 출발해 불과 일주일 만에 속전속결로 온 가족이 한국에 도착한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한국 야경은 너무나 황홀했다. 밤은 어둡다는 그의 상식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어떻게 할지 몰라하고 있는데 앞에 총을 멘 군인이 보였다. 군인의 등을 툭툭 친 뒤 김 씨는 돌아본 그에게 “안녕하십니까. 북조선에서 왔습니다”라고 했다. 군인은 깜짝 놀라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군인 한 명이 더 나타났다.

“따라오십시오.”

공항 내부 어느 방에 들어가 기다리니 승용차가 왔다. 승용차에 타고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바깥 풍경은 더욱 밝아졌다. 김 씨가 받은 한국의 첫인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밝다’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인터뷰하던 김 씨 표정은 반대로 점점 어두워졌다. 한 달간 조사를 받으면서 그는 탈북민들이 쓴 책을 많이 읽었다. 그는 북에서 살았지만 북한이 어떤 곳인지 몰랐다. 돈을 많이 벌어 오는 어머니 덕분에 열심히 공부만 하고 살았는데, 그가 읽은 책들 속 북한은 지옥이었다.

하나원에 가서 받은 충격은 더 컸다. 북한 여러 지방에서 살았던 다른 탈북민들에게서 들은 생생한 이야기는 그가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굶어 죽고, 총에 맞고, 중국에 팔려 가고, 감옥과 교화소에서 비참하게 살았던 그들의 증언은 그를 매일같이 슬프게 했다.

‘이들의 고통을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2012년 서울대 재학 시절의 24세 김성철 씨.

2012년 서울대 재학 시절의 24세 김성철 씨.

● 서울대에 입학하다

가족의 첫 정착지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빌라 반지하였다. 전라도에 있는 임대주택을 받았지만 김 씨의 모친은 거기보단 자신의 남동생이 있는 서울에서 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2006년 한국에 와서 10년 넘게 살고 있던 외삼촌도 사기를 당해 힘든 시간을 겨우 이겨 내는 중이어서 누나를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반지하에 자리를 잡으니 눈물이 많이 났다. 반지하방은 습기가 심해 곳곳에 곰팡이가 피었고 바퀴벌레도 수시로 나왔다.

북에서 살 때 친구들은 그의 집을 궁전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번 돈으로 동네에서 제일 좋은 집을 샀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보다 50년은 앞서 있다고 생각하고 온 서울에서 반지하방 신세가 되니 서글펐다. 고향 친구들도 못 견디게 그리웠다. 몇 달 뒤 용산구 후암동 옥탑방에 다시 자리를 잡았지만 허름하긴 마찬가지였다.

북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군 생활도 1년을 했지만 한국에 오니 나이가 18세밖에 안 돼 고등학교에 가야 했다. 용산고 1학년으로 입학했다. 그 학교 첫 번째 탈북민이었다. 용산엔 임대주택이 없어 탈북민들이 살지 않기 때문이다.

1고등 출신인 그에게 한국 고등학교 1학년 수학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북에서 왔는데도 수학을 잘하는 데다 군 생활까지 했다고 소문난 덕분인지 학교에서 그를 괴롭히는 학생은 없었다.

학교에 다녔지만 그에겐 공부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실존적 고민으로 방황하던 시기였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특히 철학책을 많이 읽었다. 학교에선 하루 종일 열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방황하며 학교를 다니다 보니 성적은 점점 하락했다. 졸업하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때부터 대학에 가려고 재수학원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나쁘진 않았기에 성적은 노력한 만큼 올랐다.

2010년 그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서울대는 2005년 저소득 가구와 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마련한 기회균형선발특별전형에 새터민 전형을 추가했다. 학부 정원에 구애받지 않는 정원 외 선발 방식으로 연간 18명까지 선발할 수 있었지만, 실제론 매년 평균 한두 명만 입학시켰다. 그해 그는 서울대에 입학한 유일한 탈북 학생이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2022년 한 스타트업에서 일하던 김성철 씨.

서울대를 졸업하고 2022년 한 스타트업에서 일하던 김성철 씨.

● 나의 장벽은 무엇일까

2015년 여름 김 씨는 강원 고성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가는 무전여행을 시작했다. 고등학교에서 시작된 정신적 방황은 대학에서도 그를 계속 괴롭혔다. ‘사회학과를 택한 것은 잘한 일인가’ ‘앞으로 어떻게 진로를 정하고 살아야 할까’ 등의 고민이 이어졌다. 1년 동안 휴학을 하면서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 길을 나서면 뭔가 깨달음이 있지 않을까 싶어 동해안을 그의 ‘방황 길’로 정했다. 정처 없이 걷다가 식당에 들어가 “무전여행 중인 대학생인데, 청소해 드리고 밥을 먹어도 되냐”고 묻기를 반복했다. 놀랍게도 그에게 청소를 시키고 밥을 준 식당은 한 군데도 없었다. 모두 공짜로 밥을 줬다. 공중화장실에서 씻고 텐트에서 잤다. 부산까지 도착하는 데 한 달이 걸렸다. 마지막 밤은 부산의 한 찜질방에서 잤다.

여행 기간 많은 깨달음도 얻었다. 특히 어느 마을 외양간 앞에서 가장 크게 깨달았다. 그가 다가가자 소들은 반갑다는 듯 음메 음메 울었다. 울타리는 다 썩었고 고삐도 없는데 소들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크다고 느끼는 장벽이 어쩌면 저 썩은 울타리와 같은 것은 아닐까. 별것도 아닌 벽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시작하고 부딪쳐 보자.’

서울에 돌아온 그는 머릿속에 늘 맴돌았지만 쉽게 내리지 못하던 결정을 했다. 컴퓨터공학과로 진로를 바꾼 것이다. 지금도 그는 그때의 방황에 긍정적이다. ‘방황도 노력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는 자에겐 방황도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렇게 긴 방황을 끝내고 2017년 대학을 졸업했다. 유학을 가려 했지만 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져 갈 수가 없었다.

그의 부친은 한국에 온 뒤로 지금까지 20년째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올해 66세임에도 “힘을 쓸 수 있을 때까지 일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어머니도 동생과 함께 식당을 열어 운영하는 등 온 가족이 부지런히 살고 있다. 두 살 아래 동생은 2017년 형과 같이 대학을 마치고 로스쿨에 입학해 2023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대학을 졸업한 김 씨는 보안 솔루션을 납품하는 스타트업 회사에 취직했다. 프로그램 개발을 배워 장차 창업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난해 마침내 자신의 회사를 설립했다.

김성철 씨가 지난해 12월 남북하나재단의 탈북민 창업가들을 위한 행사에서 발표하고 있다.

김성철 씨가 지난해 12월 남북하나재단의 탈북민 창업가들을 위한 행사에서 발표하고 있다.

● ‘대동강의 기적’을 꿈꾸다

대학 졸업 후 8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가장 큰 성취라고 하면 가족을 꾸린 것이다. 2020년 그는 교회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했고 이듬해 아들도 태어났다. 가족이 생기니 집에서 독립해 8년 동안 열심히 모은 돈으로 집도 샀다.

그가 창업한 코넥신(Konexin)은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다양한 AI 구독 서비스를 하나로 통합한 ‘AI 멀티 챗’ 플랫폼을 개발한다. 여러 AI 모델을 각각 구독할 때 발생하는 비용을 줄여 주고 모델마다 다른 복잡한 사용법을 통합해 쉽게 이용하도록 도우며, AI가 가짜 정보를 사실처럼 말하는 할루시네이션 현상을 개선해 정확도를 향상하겠다는 것이 목표다.

프로그램 개발은 이미 마쳤지만 넘어야 할 난관도 만만치 않다. 작은 스타트업이 진입하기엔 시장의 진입장벽이 너무 높아 수익화하기 어렵다는 것이 고충이다.

그래서 공공기관이 활용할 수 있는 AI 영상 생성 솔루션도 함께 개발했다. 이 프로그램은 올해 말 납품하기로 계약까지 마쳤다. 어떤 일을 해도 생사의 선을 넘었고 마음의 장벽을 허물었던 그이기에 두려운 것은 없다.

“한국에 살아 보니 여기야 말로 주체사상이 확실하게 구현된 사회입니다. 북한은 주체사상의 핵심을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고 자기 운명을 개척할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자기가 개척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죠. 수령과 당이 시키는 대로 직업을 선택해야 하고 시키는 일만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야말로 자기 운명을 자기가 개척하는 곳이지요.”

그런 사고의 연장선에서 보면 북한에선 불가능했지만 자유 세상에서만 가질 수 있는 시민의 권리도 무척 소중한 가치이다. 그래서 그는 지난 20년 동안 단 한 번도 투표를 포기한 적이 없다. 자유와 권리를 소중히 지켜야 한다는 의지의 발로이기도 하다.

아직도 보고 싶고 그리운 고향 친구들도 하루빨리 이런 자유와 권리의 나라에서 살게 하고 싶은 꿈이 있다.

“아직 저는 인생의 절반도 살지 않았습니다. 제가 살아 있을 때 통일은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대동강 옆에서 태어나 한강 옆에서 살고 있습니다. 통일이 오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제가 보고 경험한 한강의 기적을 대동강의 기적으로 바꾸는 것이 제 평생의 소망입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