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의 아버지’.
컴퓨터업계에서 서울대 컴퓨터연구소 출신인 고(故) 민상렬 교수를 부르는 말이다. 그는 시대에 앞서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가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내다본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그의 연구팀은 플래시 메모리를 활용한 저장장치 연구로 전 세계 반도체업계를 뒤흔든 혁신의 초석을 세웠다.
1990년대 후반까지 주류 저장장치는 HDD였다. HDD는 물리적 회전과 기계적 동작이 필수인 장치다. 속도 저하와 내구성 문제를 야기하는 탓에 고질적인 한계가 있었다. 민 교수는 기계적 움직임이 없는 플래시 기반 저장장치가 결국 이를 대체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민 교수는 그중에서도 ‘플래시 변환 계층(FTL)’ 기술에 주목했다. FTL은 플래시 메모리의 물리적 특성과 다르게 데이터를 논리적으로 배치하고, 읽기·쓰기 성능을 극대화하는 소프트웨어 기술이다. 플래시 메모리는 HDD와 달리 덮어쓰기가 불가능하고, 일정 횟수 이상 쓰면 수명이 줄어드는 한계가 있었다. 이 기술 개발 덕에 기존 HDD 기반 소프트웨어도 별다른 수정 없이 플래시 메모리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민 교수의 연구는 단순한 학문적 성과를 넘어 반도체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연구팀이 개발한 FTL은 당시 대부분의 상용 플래시 카드와 SSD 제품에 적용됐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SSD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데 일조했다. 삼성전자는 20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SSD를 개발하며 글로벌 시장을 선점했고, SK하이닉스도 고성능 저장장치 시장에 뛰어들었다.
2015년 설립된 반도체 설계 전문 스타트업 파두는 민 교수 연구의 영향을 받은 곳 중 하나다. 파두는 고성능 데이터센터용 SSD 컨트롤러를 개발해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주목받았다. 이 회사의 핵심 인력 다수가 서울대 컴퓨터연구소 출신으로, 연구소의 기술과 철학이 산업계로 확산한 사례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연구팀은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하드웨어 연구에도 깊이 관여했다. SSD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메모리 간 위계를 정하고,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방식 등을 개발했다. 특히 데이터 입출력 최적화 알고리즘을 통해 저장장치의 수명을 늘리는 연구를 했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따로 떼어 놓고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두 요소를 통합적으로 설계해야 최고의 성능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민 교수의 철학이었다.
안정훈 기자 ajh632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