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벽에 새하얀 바닥과 천장. 미술품을 전시하는 공간의 대표적 이미지다. 이렇게 전시장을 구성하는 것을 ‘화이트큐브’라 부른다. 관람객이 작품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외부 요소나 맥락 등을 최소화한 방식이다. 하지만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막을 올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현장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보라색, 상아색, 하늘색, 초록색, 검정색, 버건디색… 다양한 색상의 벽 위로 작품이 걸렸다.
전세계 각국에서 유수의 갤러리가 모이는만큼 각 갤러리도 사전에 자신들이 소개하는 작가와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영민한 방법을 모색한다. 그 중 하나가 전시 부스를 커스텀하는 것. 기본으로 제공되는 벽과 바닥 외에도 갤러리가 추구하는 콘셉트나 분위기에 맞게 꾸밀 수 있다. 하지만 옵션마다 비용이 추가되기 때문에 대부분은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하얀 벽과 바닥을 택한다. 그렇다면 돈을 더 지불하고서라도 부스에 색을 더한 갤러리들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 있을까.
금산갤러리는 김은진 작가의 인산인해 시리즈를 초록색 벽 위에 걸었다. 인산인해 시리즈는 작가가 슬럼프에 빠졌을 당시 우연히 접하게 된 자개장을 보고 5년 전부터 시작해 온 것으로 실제 자개장에서 자개판을 분리한 후 프레임에 이를 붙여 만든다. 지난 8월 30일 시작된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에도 참여하며 전통 재료를 활용한 독창적인 활동을 선보이고 있다. 갤러리 관계자는 “주로 자연의 이야기를 담는 김은진 작가의 작품과 초록빛이 어울릴 것이라고 판단해 일부러 색을 칠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디갤러리(DIE GALERIE)는 작품이 제작된 시기순대로 가벽의 색상을 달리 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마인 강변에 자리잡은 이 갤러리는 이번 KIAF에 500년 전 작품부터 현대미술 작품까지 미술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관을 구성했다. 가장 오래된 작품은 1525년에 제작한 이탈리아 베니스 출신의 화가 Jacopo Palma il Vecchio의 'Ritratto di Donna, detta "La Schiava"’. 강렬한 버건디색 벽에 걸린 이 작품은 멀리서도 한눈에 띄어 관람객을 끌어당긴다.
디갤러리의 엘케 모어 M.A.(Elke Mohr M.A.) 총괄 디렉터는 “저희 부스의 콘셉트는 500년의 예술사를 잇는 다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피카소의 드로잉 작품 6점도 전시했다. 피카소가 채색한 ‘Tête de femme’의 얼굴색과 비슷한 뮤트한 핑크베이지 톤의 색상을 사용했다. 한국 전통 오방색을 활용하는 김두례 작가의 작품은 하얀색 벽 위에 설치했다. 앨케 모어 디렉터는 시간의 흐를수록 벽의 배경색도 연해지도록 의도했다고 설명했다.
”너무 밝은 벽에 걸면 작품의 인상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특히 피카소의 작품들은 하단부 느낌이 아주 섬세해서 뮤트한 색상의 벽이 좋은 배경이 됩니다. 오래된 작품에 사용된 강렬한 붉은색과 모던 아트에 사용한 흰색의 중간톤을 사용해 동시대 미술과 연결하는 느낌도 의도했습니다"
이강욱 작가의 단독 부스를 설치한 노화랑은 부스의 모든 벽을 연한 하늘색으로 칠했다. 에어브러시, 색연필, 스펀지 등 다양한 도구를 활용해 맑은 느낌을 내는 시리즈 ‘The gesture’, ‘Invisible space’와 어우러지게 꾸몄다. 바닥 역시 연한 회색빛의 카페트를 깔아 작품과의 조화를 극대화했다. 샘터화랑은 검은색 벽 위에 한국 현대미술계 두 거장의 작품을 나란히 걸었다. 이강소 화백의 ‘From an island-03060’과 윤형근 화백의 ‘Burnt Umber&Ultramarine’, ‘Untitled(1989)’. 갤러리 관계자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존경 받는 두 화백의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는 데 검정색만큼 적절한 색이 없다고 판단해 골랐다"고 전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기반을 두고 있는 프리모 마렐라 갤러리는 올해 처음으로 KIAF에 참여했다. 대를 이어 프리모 마렐라 갤러리를 운영하는 다니엘 마렐라(Daniele Marella) 디렉터는 “이번 KIAF 참가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인들이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며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이라고 참가 소감을 전했다.
프리모 마렐라는 이번 행사에 이탈리아 현대회화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아고스티노 아리바베네(Agostino Arrivabene)의 작품과 돌이나 황동 위에 그림을 그리는 콜라 사모리(Nicola Samori), 플랑드르 미술이나 루벤스의 작품 등 고전회화를 참조해 독창적인 해석을 선보이는 싱가포르 출신 루벤 팽(Ruben Pang) 등 다양한 비전을 지닌 작가들 작품을 소개했다.
종교적 관점부터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각까지 폭넓은 작가들의 작품을 아우를 수 있도록 부스의 콘셉트에도 공을 들였다. 벽돌색과 어두운 주황색 중간 어딘가의 색을 띄는 벽은 절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다니엘 마렐라는 원하는 색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고 전했다.
“저희 부스의 어두운 빨간색은 많은 시도 끝에 선정한 것입니다. 저희만의 색상을 통해 부스의 큐레토리얼 요소이자 다양한 작품을 하나로 모으고, 신비주의 화가의 비전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