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관세 전쟁으로 시장 변동성이 커진 가운데 국민연금의 ‘증시 소방수’ 역할이 두드러지고 있다. 반도체, 방위산업, 식음료 업종을 중심으로 저점 매수에 나서며 주력 업종의 회복 탄력성을 키우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국민연금의 매수 여력이 갈수록 줄어들 것이란 관측이 일각에서 제기된다.
◇연기금도 포기 못한 반도체·방산
14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연기금은 올 들어 국내 증시에서 총 5조5535억원어치를 순매수한 것으로 집계됐다. 코스피지수가 반짝 상승한 지난 3월(2002억원)을 빼면 1월(1조8762억원)과 2월(1조8013억원), 이달 1~14일(1조6756억원) 모두 조 단위로 사들였다.
최근 폭락장에선 기록적인 매수세로 대응한 날이 많았다. 지수가 5.57% 급락한 이달 7일 ‘블랙먼데이’ 때는 하루에 4253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최근 5년 사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3일엔 지수 2500선이 깨지자 2737억원어치를 사들였다.
연기금 흐름을 좌우하는 곳은 국민연금이란 게 증권업계의 설명이다. 운용자산 규모가 타 기금을 압도할뿐더러 주식 비중도 높아서다. 국민연금은 특히 증시 하락기에 미리 설정한 포트폴리오에 따라 매수 규모를 확대하는 경우가 많다.
이달 들어 연기금이 추가로 담은 종목을 살펴보면 시가총액 상위 반도체주와 바이오, 조선, 방산 위주였다. 삼성전자(2658억원어치)와 SK하이닉스(786억원어치)는 각각 순매수 1위, 4위였다. 반도체 업황이 회복세를 보였는데도 관세 리스크가 불거져 단기 변동성이 커진 기업들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1355억원어치)는 연기금 순매수 2위였다. 이 회사는 관세 타격이 큰 미국보다 유럽 매출 비중이 높다. 조선과 방산 대표주인 HD현대중공업(1209억원어치), 한화오션(698억원어치), 한화에어로스페이스(660억원어치) 등도 많이 담았다. 반면 에이비엘바이오(-625억원어치), 두산에너빌리티(-262억원어치) 등에선 순매도 우위였다.
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 대표는 “거래량이 많고 장기 투자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 종목이 국민연금 포트폴리오의 중심”이라며 “국민연금의 투자 일임을 맡은 운용사들 역시 관세 영향이 작은 곳을 노려 저가 매수에 나섰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 매수 여력 작을 수도”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올 1분기 5% 이상 보유한 일부 종목의 투자 비중을 높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마트(10.01%→12.58%), 현대백화점(10.03%→11.45%), 오리온(10.53%→10.63%) 등 유통 및 식음료 관련주가 대표적이다. 수십조원 규모 추가경정예산이 확정되면 수혜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게 증권업계 시각이다. 국민연금은 BNK금융지주(8.61%→9.63%), 한국금융지주(9.51%→10.95%) 등 금융·증권주 지분도 늘렸다. 영업이익 개선과 주주환원 확대로 주목받은 업종이다. 조선·방산주 중에선 LIG넥스원(10%)과 STX엔진(8.35%)을 신규 매수했다.
다만 국민연금 매수세가 계속되기 어려울 것이란 시각도 있다. 국내 주식 비중이 지난 11일 기준 12.7%(독립 리서치 알음리서치 추정)인데, 2029년까지의 장기 목표치 역시 13%에 불과해서다. 추가 매수 여력이 별로 없는 셈이다. 국내 증시를 방어하는 ‘큰손’이 추가 매수에 나서지 않으면 대형주의 회복 탄력성이 기대에 못 미칠 것이란 우려가 커질 수 있다. 최성환 알음리서치 대표는 “국민연금의 포트폴리오 조정이 마무리 단계”라며 “외국인 매도세를 감안할 때 국민연금이란 버팀목이 사라지면 국내 증시의 민낯이 드러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