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대 외교안보 설계자 故키신저
트럼프 2기 패권전략 이해하는 ‘열쇠’
“푸틴은 히틀러 아닌 도스토옙스키,
우크라 나토가입 인정 땐 美에 불리”
트럼프·푸틴 밀착행보 해석의 틀 제공
트럼프가 만든 ‘정직한 위선’의 시대
복잡해지는 한국의 ‘이익 방어’ 셈법
미·러 간 세기의 담판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2025년의 세계사에서 우크라이나 종전을 두고 힘겨루기를 펼칠 ‘트럼프’와 ‘푸틴’입니다.
우크라이나와 협상하며 ‘30일 휴전안’을 만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이 제안을 수락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수용한다면 ‘임시휴전→추가 휴전 및 재건 협상→영구 종전 합의’라는 평화의 돌파구가 열립니다.
물론 3년 전 우크라이나 침공 후 살육의 전쟁을 이어온 푸틴 대통령이 임시 휴전안을 쉽게 수긍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트럼프 대통령이 쥔 카드 패입니다
그는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을 통해 미·러 관계 정상화, 우크라이나 광물 이익 확보, 세계평화 조성자로서 위상 확대 등 다양한 이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종전 협상을 둘러싸고 이해당사자인 유럽 동맹들이 ‘패싱’을 당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립니다.
또 백악관에서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꿀밤 먹이듯 거칠게 다루는 모습에서 약소국의 비애를 느끼는 독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강대국 외교는 긴 세월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그들만의 공식으로 작동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 은밀한 공식은 파편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의 묶음으로 이해하는 ‘맥락’을 제공합니다.
러·우 전쟁 임시 휴전 논의를 둘러싼 다양한 사건들에서 숨은 맥락을 찾으려면 ‘왜 트럼프가 동맹국들의 욕을 얻어먹어가며 푸틴과 밀착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고(故) 헨리 키신저(1923~2023년)가 제공합니다.
그는 닉슨 행정부에서 첫 국무장관직을 맡은 뒤 현실 정치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외교 전문가입니다. 1970년대 동서 진영 간 긴장 완화를 주도했고 미국의 베트남전 철수, 중국과의 수교 및 개방 등 굵직한 국제 사건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가 어떤 서방의 외교안보 전문가보다 푸틴 대통령과 다양한 대면 만남과 전화통화 등으로 적극 소통한 인사였다는 점입니다. 생전 17번 푸틴 대통령과 만난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래서 유수의 언론이 그를 인터뷰하며 미·러 패권 문제를 다뤄왔고 그 방대한 인터뷰 기록을 들여다보면 2025년의 트럼프 행정부가 왜 약자인 우크라이나에게는 강하게, 강자인 러시아에는 순한 양처럼 행동하는지 맥락이 보입니다.
먼저 키신저는 푸틴에 대한 대중의 통념(독재자·살인마·암살자 등)과 다른 흥미로운 ‘정체성’ 분석을 내놓습니다. 바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도스토옙스키에서 푸틴이 꿈꾸는 러시아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푸틴은 히틀러와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정체성)에서 나온 인물이다. (FT·2018년)
“푸틴을 이해하려면 ‘나의 투쟁’(히틀러 자서전)이 아니라 도스토옙스키를 읽어야 한다. 푸틴은 수 세기 동안 제국의 위대함으로 자신을 정의했지만 소련 붕괴와 함께 300년의 제국 역사를 잃은 국가의 수장이 됐다. 러시아는 중국 국경의 ‘인구학적 악몽’, 똑같이 긴 남쪽 국경의 급진 이슬람이라는 ‘이념적 악몽’, 서쪽으로는 유럽이라는 ‘역사적 도전’ 등 각 국경에서 전략적 위협을 받고 있다. 러시아는 미국이 설계한 체제의 보조자가 아니라 동등한 강대국으로서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애틀랜틱·2011년)
푸틴과 여러번 만나면서 키신저는 푸틴의 정체성이 1880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의 유명한 대중 연설과 닮아있다고 평가합니다.
‘푸쉬킨 연설’로 불리는 이 역사적 연설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우월과 배타의 논리가 아닌 러시아인의 민족적 독자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강조했습니다. 전인류적 구원과 통합에 대한 러시아 민족의 사명을 호소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정체성이 박힌 푸틴을 아돌프 히틀러와 동일시하면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키신저는 지적합니다. 그리고 2016년 CBS 인터뷰에서 말합니다.
“푸틴은 도스토옙스키에서 나온 인물로, 그가 보는 러시아 역사에 대한 연결감과 내적 연관성이 매우 큰 인물이다. 러시아 국익에 대한 냉철한 계산자이며, 그에게 러시아의 정체성 문제는 매우 중요한데, 공산주의 붕괴의 결과로 러시아는 약 300년의 역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러시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그들의 마음속에 아주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는 (개척의 역사에서 제국주의로 성장한) 미국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문제다.
푸틴을 히틀러와 같은 냉혈한으로 악마화하기보다 질곡의 러시아 역사를 이해하고 구원과 통합을 꿈꾸는 푸틴의 지향점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게 죽은 키신저가 백악관에 조언하는 강대국 외교의 기본 자세인 것이죠.
키신저는 무엇보다 광활한 러시아 영토에서 발생하는 어떤 현상 변경도 미국의 국익 셈법에 유리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겐 끔찍한 얘기이지만, 키신저는 2022년 러·우 전쟁 발발 전까지 시종일관 우크라이나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시켜선 안 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미국에게 우크라이나의 평화 못지않게 중요한 건 유럽과 러시아의 경계에서 우크라이나가 예전처럼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품에 안기게 되면 러시아와 유렵 간 지정학 불안이 상시화할 위험성이 높아지고 이는 미국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현상 변경인 것이죠.
“역사상 러시아보다 많은 전쟁을 일으키거나 혼란을 일으킨 나라는 거의 없다. 그러나 16세기 몽골, 18세기 스웨덴, 19세기 나폴레옹, 20세기 히틀러 등 러시아를 압도하려는 세력으로부터 러시아가 세계의 평형을 지켜왔다.”(애틀랜틱·2016년)
“러시아의 지리적 전략적 규모, 위대함에 대한 거의 신비로운 개념,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는 국민들의 의지는 지난 수 세기 동안 몽골과 스웨덴, 프랑스, 독일의 제국주의 시스템에 맞서 러시아가 세계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됐다.”(CapX·2017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보다 러시아가 미국 패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유럽과 힘의 균형을 이뤄온 점에 미국의 이익을 집중하라는 것이죠.
키신저가 강조하는 감성적 정체성의 관점에서도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애국심으로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푸틴에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절대 수용 불가능한 딜 브레이커입니다.
그런데 전쟁의 진화를 지켜보며 키신저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불가를 외쳤던 자신의 의견을 극적으로 수정합니다.
2023년 1월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서 그는 “전쟁 전에 나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반대했다”면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과정들이 시작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중립에 대한 생각은 (전쟁이 계속되는) 지금 상황에서 더는 의미가 없다”며 “이제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적절하다고 믿는다”고 밝혔습니다.
발언을 들어보면 뭔가 명확한 논리를 찾기 어려운데 그해 5월 ‘더 이코노미스트’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의 소름끼치는 현실주의 관점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이제 우크라이나를 유럽에서 가장 잘 무장된 국가이면서도 전략적 경험이 가장 빈약한 지도부를 만들었다. 만약 전쟁에서 러시아가 많은 것을 잃고 세바스토폴(크림반도를 지칭)을 점령한 채로 끝날 경우, 러시아도 불만족스럽지만 우크라이나도 불만족스러운, 다시 말해 불만의 균형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유럽의 안전을 위해서는 (작아진 영토에 불만을 가진) 우크라이나가 영토 관련 국가적 결정을 내릴 수 없도록 나토에 편입시키는 게 더 낫다. ”
“기자 질문=우크라이나를 나토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우크라이나 방어가 아닌 유럽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위험을 줄이자는 것인가?”
“유럽인들은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이 (러시아를 자극해) 너무 위험해서 원하지 않고, 그래서 우크라이나를 무장시키고 최첨단 무기를 제공하겠다고 말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잘못된 방식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우크라이나를 중립국화해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서 힘의 완충이 이뤄지기를 바랐던 키신저는 더 커진 러시아 위협과 함께 서방의 첨단 무기 지원으로 중무장하고 전쟁 경험을 획득한 우크라이나가 미래 다른 유럽 국가를 상대로 오판을 할 위험성까지 내다보며 가입 지지로 입장을 바꿨습니다.
임시 휴전안을 제안한 트럼프 그의 바뀐 입장보다 나토 가입을 반대하는 종전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키신저는 그해 11월 코네티컷 자택에서 향년 100세로 눈을 감습니다.
“역사적으로 트럼프는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낡은 가식을 벗도록 강요하기 위해 때때로 출현하는 인물 중 한 명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 스스로 이 소명을 알고 있거나 그가 멋진 대안을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다. 트럼프는 그냥 우연일 수도 있다.”(FT·2018년)
마지막으로 지정학 질서를 완전히 뒤집고 있는 트럼프 행보에 대해 키신저는 7년 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아마도 키신저는 당시 트럼프가 재임에 실패할 ‘우연적 리더’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사에서 132년만에 ‘징검다리 재집권’에 성공했습니다.
얼마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이문영 교수는 트럼프·젤렌스키 간 백악관 회동 참사를 가리키며 우아한 위선의 시대가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왔다고 비유했습니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 패싱이든, 우크라 나토가입 불가 등 어떤 식으로든 3년의 러·우 전쟁을 종결시킨다면 트럼프에 대한 평가는 키신저가 무게를 둔 ‘역사적 우연’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트럼프가 열고 있는 정직한 야만의 시대에서 한국이 어떤 방식으로 국익을 방어하고 더 키워야할지 그 셈법이 무척 복잡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