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용지 못 받은 국민들 가만있겠냐"…야인시대 대사가 현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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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야인시대'

드라마 '야인시대'

일제강점기부터 3공화국까지 한국의 굵직한 근현대사를 담은 드라마 속 부정선거 모의 장면이 6·3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 용지 부족 사태' 이후 재조명됐다.

4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2003년 9월 방영된 SBS 드라마 '야인시대' 121회 방송분이 수시간 만에 수십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급속도로 공유됐다.

네티즌들이 재조명한 해당 회차는 정치깡패 임화수(최준용 분)가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부하들과 표를 빼돌리기 위한 수법을 모의하는 대목이다.

극 중 한 부하는 "자유당은 총 투표수 중 4할을 사전투표하기로 했다"는 임화수의 말에 "그만큼 투표자들의 용지를 우리 쪽으로 빼내야 하는데, 국민이 용지를 받지 못하면 가만히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임화수는 "그 무식한 국민들이 뭘 알겠나. 용지가 안 나왔으면 그냥 안 나왔나 보다 하겠지"라고 답한다.

극 중 투표용지를 고의로 빼돌려 유권자들의 투표권을 원천 봉쇄한다는 이 설정은, 놀랍게도 2026년 현재 대한민국 선거판에서 벌어진 초유의 사태와 기묘하게 오버랩되며 대중의 공분을 자극했다.

드라마 속 황당한 대사가 다시 회자된 결정적 배경은 지난 3일 치러진 6·3 지방선거 본투표에서 실제로 '투표용지'가 모자라 시민들이 투표를 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4일 오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투표함 이송이 지연되고 있는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에서 김범진 서울시선관위 사무처장이 시위대의 반발을 받고 있다. 사진=뉴스1

4일 오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투표함 이송이 지연되고 있는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에서 김범진 서울시선관위 사무처장이 시위대의 반발을 받고 있다. 사진=뉴스1

이날 서울 송파구, 강남구, 광진구 등 무려 14개 투표소에서 준비된 투표용지가 조기에 소진되며 투표 절차가 일시 중단되는 대혼란이 빚어졌다. 선관위는 급기야 부족분을 긴급 이송하고, 현장에서 대기하던 유권자에 한해 마감 시간 이후에도 투표할 수 있도록 임시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허철훈 선관위 사무총장은 같은 날 오후 9시 과천 중앙선관위 청사에서 긴급 브리핑을 열고 "국민 신뢰를 훼손한 점에 책임을 통감하며 깊이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물론 영상 속 자유당 정권의 '4할 사전투표'는 역사적인 고의적 부정선거를 극화한 것이고, 이번 6·3 지방선거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선관위의 수요 예측 실패 및 '인쇄 물량 부족'에서 비롯된 행정적 과실로 사실관계가 전혀 다른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관위의 뼈아픈 실책이 결과적으로 선거 때마다 고개를 드는 '부정선거 음모론자'에게 불필요한 빌미를 제공했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정치권의 질타도 쏟아졌다. 더불어민주당은 논평을 통해 "투표용지가 부족해 주권자의 참정권이 원천 차단당하는 사상 초유의 무능한 행정"이라며 "선관위는 단순 사과로 덮을 것이 아니라 철저한 진상 규명과 지위 고하를 막론한 책임자 문책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극적인 역전승으로 5선 고지에 오른 오세훈 서울시장 역시 "서울시민들의 소중한 주권 행사가 선관위의 준비 부족으로 차질을 빚은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선관위는 뼈를 깎는 쇄신으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고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허철훈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이 6·3 지방선거 본투표가 실시된 3일 경기 과천 중앙선관위원회에서 서울 송파구 등 일부 투표소에서 벌어진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1

허철훈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이 6·3 지방선거 본투표가 실시된 3일 경기 과천 중앙선관위원회에서 서울 송파구 등 일부 투표소에서 벌어진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1

단순 사과로 덮고 넘어갈 사안이 아니라는 여론이 팽배한 가운데, 향후 정치권의 대대적인 선관위 국정조사 및 책임자 문책 요구가 이어질 것으로 보여 이번 사태가 몰고 올 후폭풍은 선거 이후 정국을 강타할 뇌관이 될 전망이다.

이미나 한경닷컴 기자 help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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