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 간 도청 전쟁은 스파이 역사에 많은 자취를 남겼다. 그 전쟁의 서막은 소련의 모스크바에 있던 미국대사 집무실 도청이었다. 1945년 8월 소련은 미국대사에게 미국 국장(國章)이 새겨진 목각 장식물을 선물했는데, 그 안에 도청기가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모른 채 이 장식물을 7년간 집무실에 걸어 놓았다.
소련은 1991년 연방 해체 때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미국을 도청했다. 신축 미국대사관 건물 벽 안에 수백 개의 마이크를 설치하는가 하면, 미 공관 타자기에 도청 장치를 심기도 했다. 타자기 내부 알루미늄봉에 송신 장치를 설치해 타자한 내용을 수집하는 방식이었는데, 10년간 지속됐다. 도청 장치는 타자기 16대에서 발견됐다.
1970년대 체코의 미국대사 도청 사건은 그 방식 때문에 유명하다. 미국대사가 구입한 구두가 배송되는 과정에서 이를 체코 비밀경찰국이 가로채 도청 장치를 숨긴 밑창으로 교체한 것이다. 해당 장치는 비밀경찰국 협조자였던 대사관저의 체코인 가정부가 구두끈을 당겨 작동시켰다.미국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주미 소련대사관 건물 배수관에 도청 장비를 설치하는가 하면 도청용 터널을 뚫기도 했다. 1950년대 소련군 통신망 도청을 위해 동베를린으로 통하는 지하터널을 건설했고, 1977년에는 소련이 대사관 신축 이전을 추진하자 미 연방수사국(FBI)이 대사관 밑으로 도청용 터널을 뚫는 공작을 했다. 당시 대사관 인근 민간주택을 구입해 거점으로 삼고 공사에 착수했는데 정보 유출 때문에 중단되고 말았다.
1970년대 초 미 정보기관과 해군 합동의 ‘아이비 벨스’ 작전은 최고의 도청 성공 사례다. 오호츠크해에 설치된 소련 해군 통신케이블을 탐지해낸 미국이 잠수부를 보내 도청 장비를 심고 고급 정보를 장기간 수집한 것이다. 하지만 1980년 전직 미 국가안보국(NSA) 요원이 소련에 정보를 누설하면서 종결됐다.
냉전 이후 정보기관의 도청 전쟁은 적국뿐만 아니라 우방국으로까지 전선이 확대됐다. 이는 2013년 전직 NSA 정보요원인 에드워드 스노든의 도청 실태 폭로와 미국의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 휴대전화 도청 사건 등으로 밝혀졌다. 도청 방식도 고도화됐다. 400m 떨어진 건물 유리창에 적외선을 쏴 음성 진동으로 도청하는 기술이 이젠 구식이 됐을 정도다. 스파이들에게 도청이 매력적인 수단인 이유는 생생하고 적시성 있는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다. 오래전 만난 외국 정보기관 간부가 “도청 기술은 상상 이상”이라고 했던 말이 무방비 정보 유출에 대한 경고로 아직도 머리에 맴돈다. 이제 국가 안보와 국익을 위한 스파이들의 정보 활동에서 ‘설마’라는 단어는 지워야 한다.정일천 가톨릭관동대 초빙교수·전 국정원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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