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오르자, 피에르 요바노비치의 손끝에서 탄생한 큐비즘 무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따뜻한 색감의 색종이를 붙인 콜라주 스타일의 컬러풀한 배경막은 광활한 평야와 저 멀리 펼쳐진 지평선을 3단계의 원근법으로 표현하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프랑스 남부 출신의 요바노비치가 고향 자연에서 받은 영감을 담은 라운드형 무대가 자아낸 아늑한 분위기는 오페라 전막을 감상하는 동안 편안함을 불러 일으켰다.
‘당신의 사랑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한 국립오페라단(단장 겸 예술감독 최상호)의 2024 시즌 첫 작품 <피가로의 결혼>은 무대 미술과 조명 효과가 특히 두드러졌다. 다양한 시각적 장치들이 볼거리를 풍성하게 해줬다. 1778년 프랑스에서 발표된 피에르 보마르셰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모차르트의 4막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겉으로는 18세기 스페인 세비야를 배경으로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혁명 직전의 사회 구조와 계급 갈등을 반영한 작품이다.
귀족 계급의 특권을 정면으로 비판한 원작은 한때 프랑스에서 상연이 금지되기도 했다. 모차르트와 대본가 로렌초 다 폰테는 이를 오페라로 각색하며 민감한 정치적 요소를 유쾌한 음악과 희극적 전개로 풀어냈다. 예를 들어, 1막에서 백작과 백작부인이 '딩딩동동' 멜로디로 피가로와 수잔나를 부르는 장면은 호출 벨을 연상케 하며 귀족과 평민의 종속 관계를 풍자적으로 표현한다. 두 주인공의 재치와 기지가 향후 백작을 어떻게 골탕 먹일지를 암시하는 유쾌한 장면이다.
총 4막으로 구성된 이번 오페라의 무대는 ‘입체주의와 그림자의 예술’이라 표현할 만하다. 피가로와 수잔나의 침실 뒤에는 나선형 무대장치와 한 그루 커다란 초록 나무가 설치돼 있다. 알마비바 백작의 저택이 굽이굽이한 산등성이를 지나 숲 속에 자리한 공간임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두 주인공이 노래할 때 생긴 그림자는 감정의 변화에 따라 하나였다가, 감정의 충돌이 고조되면 점차 멀어지며 시각적으로 감정과 정서의 거리감을 표현해냈다.
2막과 3막에서는 회전무대와 함께 태양의 위치가 바뀌며 시간의 흐름을 표현했다. 새벽에서 아침, 오후에서 밤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조도 변화는 무대 속 시간의 경과를 입체적으로 보여줬다. 4막에서는 2층 발코니에서 쏘는 탑 조명이 무대를 가로지르며 달빛을 표현했고, 이는 객석을 포함한 극장 전체를 장면 전환의 공간으로 확장시켰다.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다 폰테 3부작(<돈 조반니>, <코지 판 투테>, <피가로의 결혼>)을 연출하며 명성을 얻은 뱅상 위게가 이번 공연의 연출을 맡았다. 이번 연출에서는 피가로와 수잔나가 알마비바 백작을 '사장님'이라 부르며, 1930년대 프랑스 패션계를 배경으로 설정했다. 백작은 패션 기업의 CEO, 백작부인은 전설적인 디자이너로 등장한다.
연출자는 이번 연출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국립오페라단을 통해 밝혔지만, 실제 작품을 보면 유사성이 뚜렷하지 않아 크게 공감이 되진 않았다. 가난한 기택 가족이 위장취업으로 상류층 집에 침투하는 <기생충>의 설정과, 피가로가 귀족인 백작의 욕망에 맞서 수잔나를 지키기 위해 활약하는 오페라의 접점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이번 오페라는 A팀(20일, 22일)과 B팀(21일, 23일)으로 나뉘어 더블 캐스팅으로 진행됐다. A팀은 노련함과 안정감을, B팀은 젊은 패기와 생동감을 보여줬다. 특히 인상 깊었던 두 성악가는 A팀의 케루비노 역 라헬 브레데와 B팀 백작부인 역의 최지은이었다. 메조소프라노 라헬 브레데는 큰 키와 무대 존재감으로 '호젠롤레(여성이 연기하는 남성 역할)'인 케루비노를 실감 나게 표현했다. 'Voi che sapete'(사랑의 괴로움을 그대는 아는가)를 부를 때는 잘생기고 키 큰 훈남이 무대 위에 서 있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소프라노 최지은은 2막에서 책상에 앉아 'Porgi, amor'(사랑이여, 안식을 주소서)를 불렸는데 풍성한 음색과 섬세한 기교, 안정적인 호흡을 보여주며 한국을 대표할 차세대 리릭 소프라노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줬다. 3막의 아리아에서는 흉성과 두성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표현력을 보여줬으나, 피아니시모로 고음을 처리할때 다소 템포가 느려지며 음악적 흐름을 지연시키는 점이 작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번 공연의 가장 아쉬운 점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의 특성과 음향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일부 연출 요소였다. 1막 피가로의 아리아에서는 구두를 장갑처럼 손에 끼고 바닥을 두드리는 장면의 소음이 음악을 방해했고, 'Non più andrai'(더 이상 날지 못하리)에서는 케루비노의 머리에 양동이를 씌우고 두드리는 연출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편지의 이중창(Canzonetta sull’aria)에서는 1층과 2층에서 노래하는 수잔나와 백작부인 사이의 거리와 오케스트라의 조화가 맞지 않아 음향적으로 불균형을 느끼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막에서 백작부인이 혼자 과거를 회상하며 부르는 독창 장면에 과거의 백작이 무대에 등장해 백작부인을 만나는 연출은 신선했다. 또 바람둥이 백작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며 그를 쉽게 미워할 수 없게 만든 해학적인 연출도 돋보였다.
무대와 장면 전환의 중심에는 3시간 내내 판소리판의 고수처럼 장면을 이끈 국립심포니의 쳄발로(하프시코드) 연주가 있었다. 레치타티보 반주를 통해 인물의 감정을 조율하고, 장면 간 흐름을 이어주는 역할을 완벽히 해냈다.
지휘를 맡은 다비드 라일란트는 서곡부터 빠른 템포로 이끌며 오페라 전체의 리듬을 빠르게 진행했지만, 오페라 무대에서 경험이 많은 국립심포니는 안정된 연주력을 보여주었다. 다만 오페라라는 장르 특성상 성악가들과의 긴밀한 음악적 호흡이 중요한 만큼, 한국의 오페라 전문 지휘자들이 떠오르는 순간도 있었다. 빠르게만 연주한 템포는 성악가들의 대사 전달력을 떨어뜨렸고, 호른의 음이탈과 한 남성 성악가의 고음이 때로는 생목소리처럼 들리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사랑, 의심, 용서, 화해 등 다양한 감정을 계급 간 시선의 차이로 풀어낸 국립오페라단의 <피가로의 결혼>은 남프랑스의 햇빛을 연상케 하는 무대 미술 효과가 해피엔딩으로 이어지는 오페라의 서사를 더욱 부드럽고 몰입감 있게 전달한 작품이었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