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일 오후 3시30분 조경래 파키스탄 코피아(KOPIA)센터 초대소장이 거의 5년만에 서울 땅을 밟았다. 34년 공직의 퇴임이다. 코피아센터를 운영하는 농촌진흥청은 퇴임을 만류했지만 ‘건강상의 이유와 후임자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물러나야 한다는 조 소장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파키스탄 코피아센터는 2020년 9월14일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농업연구청내에 설립됐다. 설립 초기에는 조 소장을 포함한 직원 4명과 2만234㎡(약 6000평) 규모의 실험농장으로 시작했다. 낯선 땅에서 온 조 소장은 파키스탄 사람들에게 ‘보이는 신뢰’를 주어야 했다. 그는 직원 둘과 함께 황무한 땅에 몇달간 밤을 지새우며 실험 농장을 일궜다. 다른 나라 사람을 돕고 살리고자 헌신한 것이다. 당시 파키스탄 식량안보부 장관은 이러한 한국인의 모습을 보고 감동해 피자와 콜라를 선물했다고 한다. 이런 노력 덕분에 조 소장은 파키스탄 관료들에게 ‘보이지 않는 신뢰’까지 얻게 되었다. 지금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조경래를 모르면 간첩”이란 말이 나돌 정도다.
조경래 초대소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10여년전 한국 언론의 커버스토리를 장식한 기사가 떠올랐다. 그 내용은 ‘원조받던 나라 한국, 이젠 주는 나라 됐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는 선진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야 살 수 있는 공적개발원조(ODA) 대상국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최빈국이었던 한국은 1953년부터 1991년까지 40년간 127억달러 규모의 ODA를 받았다. 원조 덕분에 어려움을 이겨내고 더 나아가 ‘한강의 기적’까지 일궜다. 받기만 했던 수원국 코리아 대한민국은 2010년 마침내 경제개발협력기구(OECD)로부터 공여국의 지위를 얻었다. 2023년 한국의 ODA예산은 31개국에 4조 5,028억원까지 역대 최대규모로 늘었다. 1991년 4월엔 무상원조 전담기관인 코이카(KOICA)가 출범했다. 또 농촌진흥청의 코피아(KOPIA:KOrea Partnership for Innovation of Agriculture)도 2009년 개발도상국 현지 맞춤형 농업기술 개발·보급을 통해 생산성과 농가소득 향상을 목표로 시작했다. 코피아는 출범초 4개국에 농업기술을 전파했지만 15년이 지난 지금은 아시아·아프리카 등 20개국에 센터를 설립할 정도로 성장했다. 초창기 150억 원이던 예산은 2025년 기준 301억 원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지난 3월 24일 파키스탄의 주요 식량자원인 감자의 대량생산을 위해 ‘K-무병 씨감자 생산단지’준공식이 열렸다. 이날 준공식에서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는 그간 노력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조경래 코피아 초대소장에게 공로패를 수여했다. 수여식에서 조 소장의 사모는 눈물을 흘렸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제약되고, 여성의 신분이 낮은 이곳에 낯선 외국인 여성의 삶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녀는 남편이 힘껏 일할 수 있도록 돕고 코피아 직원들에게 따뜻한 밥한끼를 챙긴 ‘보이지 않는 조력자’였다.
조 소장은 지난 4월1일 씨감자 생산단지를 함께 일군 ‘믿을 만한’ 후임 박인태 소장에게 바통을 넘겼다. 박 소장은 2022년 경기도농업기술원 연구개발 국장을 끝으로 퇴임했다. 남은 여생을 아내와 여행도 다니며 한국에서 편히 지낼수 있었지만, 그는 다시 ‘험한 길’을 택했다. 조 소장은 “파키스탄 씨감자 생산단지의 성공 8할은 박 소장 때문”이라며 후임자에게 공을 돌렸다.
최근 한국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넷플릭스를 타고 전세계에 감동을 주고 있다. 이 드라마는 제주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읜 애순(아이유 분)과, 그런 애순을 아끼고 사랑하며 함께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는 관식(박보검 분)의 이야기를 담은 가족 드라마다. 폭싹 속았수다는 완전히 속았다는 뜻이 아니라 ‘매우 수고 많으셨습니다’는 뜻의 제주 방언이다. 부부로 한 평생 살면서 어렵고 힘든 길을 잘 이겨내준 서로에게 바치는 찬사와 감사의 말이 아닐까 싶다.
오늘, 파키스탄 코피아센터의 조경래·박인태 소장과 모든 코피아센터 직원들께 이 말을 바친다.
“폭싹 속았수다”
조경래 전 소장은 네팔 코피아센터 설립을 위해 오는 4월20일 또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다.
공태윤 기자 true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