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레에서 온 작가 헤르만 타글레 씨는 뉴욕타임스 1면이 새겨진 신문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 신문지 위 그림 속에는 유려한 곡선의 푸른색 의자가 있고, 빈티지 책상도 놓여 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있는가 하면, 침대와 소파 뒤에는 식물이 자라고 있다.

작업실에 갈 수 없었던 그에게 한 권의 책이 눈에 띄었다. 1900년부터 2000년까지 100년간 뉴욕타임스(NYT) 1면 모음집이었다. 신문의 1면을 모은 두꺼운 책이 그의 새로운 캔버스가 됐다.

신문 1면을 모은 책을 처음 펼친 날. 그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한 장 한 장 넘기다가 깨달았어요. 100년 동안의 모든 뉴스가 다 나쁜 뉴스였습니다. 전쟁, 경기 침체, 살인과 화재 사건, 백인 군중에게 린치당한 흑인….”그런데 그가 그런 뉴스를 읽는 순간에도, 우리는 ‘코로나’라는 뉴스에 폭격당하고 있었다. 그는 그 순간 묘한 위로를 느꼈다고 했다. 코로나19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 지구가 동시에 ‘같은 재앙’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만약 제가 칠레 신문 위에 그렸다면 사람들은 ‘아, 이건 칠레 뉴스구나’ 했을 거예요. 한국 신문이었다면 ‘한국 뉴스구나’ 했을 거고요.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전세계인 모두가 알잖아요. 그래서 그 신문이어야 했어요.”
그는 뉴욕타임스 1면 모음집 책을 한 장 한 장 떼어냈다. 그리고 신문지 위에 자기 아파트내부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가 그린 그림 속 가구들은 단순한 인테리어가 아니었다. 바로 자신을 살아남게 해준 생존의 도구였다. 록다운 4~5개월 동안 매일 한 점씩 그렸다.

그의 그림 속에는 집 안의 가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푸른 잎을 가진 나무도 빠지지 않는다.
“세상이 모두 멈췄을 때, 식물들은 자라고 있었어요. 차도 멈추고, 사람도 멈추고, 모든 게 정지했는데, 식물만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록다운 기간 동안 새들이 도시로 돌아오고, 곰이 마을로 내려왔다는 뉴스도 있었잖아요. 자연이 돌아오기 시작한 거지요. 생명에 대한 희망을 느꼈습니다.”
사건사고 소식이 가득한 뉴욕타임스 1면에 집 안의 풍경을 그린 그의 ‘The Times’ 시리즈는 뉴욕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이 시리즈에 ‘A Place To Be(있어야 할 자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가 록다운에서 발견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 이었다. 그림 속 의자는 비어 있다. 누군가가 와서 앉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외부에서 쏟아지는 뉴스와 내 마음 속에서 자라는 사색이 만나는 자리다.
“봉쇄 속에서 심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두 가지를 자문했어요. 내가 읽는 모든 것을 믿어야 하는가? 친구들이나 미디어가 하는 모든 말을 믿어야 하는가? 아니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게 그림 속에 담긴 메시지입니다.”

코로나 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뉴욕타임스에 그림을 그린다. 신문 속 뉴스와 그림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한다.
“이번에는 역사가 된 뉴스가 오늘도 어떻게 반복되는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예를 들어 트럼프가 베네수엘라에 침공해서 마두로를 체포했죠. 그런데 뉴욕타임스를 보면 ‘쿠바 위기’ 때 케네디 대통령이 압박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또한 마릴린 먼로와 케네디는 빌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 사건으로 반복되죠. 신문지 위에 검은색으로 표현하는 새로운 작업은 상파울루 비엔날레 큐레이터가 정말 좋아한 작업이지요.”
―AI가 발달하고, 인터넷과 유튜브로 뉴스를 보는 사람도 많은데, 왜 굳이 종이 신문인가.
“저는 오브제(object) 를 사랑해요. 킨들과 종이책 중에 고르라면 저는 종이책을 선택할 껍니다. 신문을 펼치면 1면, 2면, 3면…으로 이어지는 서사가 펼쳐지잖아요. 시간과 공간의 흐름이 담겨 있어요. AI가 모든 걸 휩쓰는 지금일수록 ‘종이신문’은 더 소중합니다. 우리는 아직 AI가 시키는 대로 하는 아바타가 아닙니다. 인간에겐 영혼도 있고 뇌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몸이 있죠. 종이신문은 몸을 인식시키는 매체입니다.

훗날 손주들이 ‘신문이 뭐예요?’라고 묻는 날이 오겠죠. 그러면 ‘이게 80년대, 90년대, 2000년대에 우리가 가졌던 정보의 모습’이라고 대답해줄 겁니다. 흥미로운 건, 사라지던 잡지들이 다시 종이로 돌아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디지털과 오브제 사이의 균형 게임이 진행 중인 셈이죠.”
그에게 한국의 신문 위에 그림을 그려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1920년에 창간한 동아일보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신문”이라고 소개했더니, 헤르만 작가는 “갤러리를 통해 복사본이라도 좋으니 옛날 기사가 나온 동아일보를 칠레로 꼭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뉴스가 담긴 종이신문에 그림을 그려 과거와 현재시간의 대화를 그림으로 표현해내는 작가가 동아일보 위에 펼쳐낼 예술세계는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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