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전력난에 대학은 애가 타는데…산업부·한전은 '남탓'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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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전력난에 대학은 애가 타는데…산업부·한전은 '남탓'만

“대학 인공지능(AI) 연구시설은 전력계통영향평가 제외 대상입니다.”

본지가 지난 12일 자 A1면으로 보도한 ‘전력난에…서울대 첨단 AI 연구 멈췄다’ 기사에 대해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가 내놓은 해명이다. 전력계통영향평가는 전기사용자가 수전(需電)을 신청하면 한국전력이 기술 검토와 계통 영향 분석을 하고 이를 산업부에 보고해 승인받는 제도다.

문제는 서울대 사례에선 이 같은 절차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도를 주관하는 산업부는 “대학 연구시설은 평가 대상이 아니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실무를 맡은 한전은 전혀 다른 대응을 했다. 서울대가 지난해 8월 10메가와트(㎿) 규모의 전력 추가 공급을 요청하자 한전은 “전력계통영향평가 대상이므로 정식 평가 절차가 필요하다”고 통보했다. 산업부의 예외 해석은 무용지물이었고, 전력 공급 권한을 쥔 한전은 ‘평가 없이는 수전 불가’ 방침을 고수했다.

결국 서울대는 무려 9개월 가까이 필요한 전력을 받지 못한 채 연구 활동을 이어가야 했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는 사실상 ‘전력 볼모’가 됐다는 게 학계의 전언이다. 전력 행정의 엇박자에 첨단 연구개발(R&D) 현장이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서울대에 따르면 관악 캠퍼스의 에너지 소비는 지난 10년간(2013~2023년) 약 30% 증가했다. 에너지 소비 증가량의 절반가량이 이공계 연구시설에서 발생했다. 서울대 관계자는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등 고연산·고밀도 연구가 늘면서 전력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지금은 실험보다 전기 걱정을 먼저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서울대 연구자들은 최신형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도입해도 구동할 전기가 없다는 데 자괴감이 든다고 호소하고 있다. 연구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클라우드 서버를 돌리는 것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AI, 반도체, 로봇 등 ‘퓨처 테크’는 고전력의 인프라가 필수다. 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은 대학을 R&D 거점으로 삼고 대용량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빠르게 구축 중이다. ‘연구자는 실험을, 국가는 전력을 책임진다’는 원칙하에 공공과 민간 인프라를 유기적으로 연계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선 최고 수준의 연구기관조차 전기 한 줄을 더 받기 위해 ‘수년짜리 행정 절차’를 기다려야 하는 형국이다.

산업부와 한전이 제도 해석과 공급 원칙에 대한 책임을 서로 떠넘기는 사이 대학 R&D 현장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제도 해석의 엇박자가 더 이상 대학 연구 생태계를 좀먹지 않도록 명확한 가이드라인과 협의 체계 정비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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