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주 울산행 KTX를 탈 계획이었다. 울산 석유화학 산업단지에서 에쓰오일·SK지오센트릭·대한유화 대표들과 만나 석유화학 구조조정 방안을 조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김 장관의 울산행은 막판에 취소됐다. 울산 석유화학 3사의 입장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번 해프닝은 한 달째 ‘밀고 당기기’만 이어지고 있는 석유화학 구조조정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난달 20일 업계가 연말까지 구체적인 사업 재편안을 내겠다고 협약을 맺은 지 거의 한 달이 지났다. 하지만 진전은커녕 기업끼리 갈등만 키우고 있다. 정부 역시 촉매 역할을 외면한 채 한 발 물러서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가 “다른 기업들 설비 감축의 혜택만 누리려는 무임승차 기업에는 단호히 대응하겠다”며 판은 깔아 놓고 정작 중재에는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석유화학 구조조정의 큰 그림은 분명하다. 안정적 원료 수급과 효율적 설비 운영을 위해 정유사와 석유화학사가 손잡는 수직 계열화와 석유화학사 간 ‘빅딜’이 그것이다. 그러나 실제 협상 테이블에선 자금 사정, 지배구조, 해외 본사와의 이해 조율 같은 복잡한 현실이 가로막고 있다. “원칙에는 공감하지만, 구체적 해법에선 이해관계가 충돌한다”는 게 공통된 토로다.
여수·대산·울산 3대 석유화학 단지에서는 각자의 사정으로 협의에 진전이 없다. 여수에서는 GS칼텍스를 축으로 LG화학, 롯데케미칼, 여천NCC(나프타분해시설)가 각각 제휴 카드를 검토 중이다. 국내 2, 3위 에틸렌 생산자인 롯데케미칼과 여천NCC의 통합설도 있다. 그러나 여천NCC 지분을 나눠 가진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의 이해관계가 다르다. 대산에선 롯데케미칼과 HD현대케미칼이 HD현대오일뱅크와 통합하는 시나리오가 거론되지만, 역시 협상은 잘 안된다. SK지오센트릭과 대한유화가 NCC 통합 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울산에선 재무 부담이 걸림돌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정부가 제시한 연말 데드라인까지는 100일 남짓이지만, 추석 연휴도 끼어 있다. 속도를 내지 못하면 공급 과잉 해소는커녕 글로벌 경쟁에서 뒤로 더 밀릴 뿐이다. 중국과 중동에서의 대규모 증설 공세가 이미 국내 업계에 직격탄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는 ‘선(先) 자구노력, 후(後) 지원’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협상 결과에 따라 막대한 손해를 져야 하는 게임에서 기업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양보할 상황이 아니다. 정부가 자구노력만 앞세워 해결될 사안이 아니란 얘기다. 부담 완화, 기업결합 심사 한시 완화 등 정책적 당근도 필요한 시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