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수 부진도 감당하기 힘든데
1·2위 수출국 빗장에 고사위기
주력 수출품목인 고부가 철강
물량 감소 넘어 수익성도 악화
열연 강판 할당량 8월에 소진
후판 등 다른 품목도 쿼터 꽉차
내년 부과 탄소세도 부담 키워
미국에 이어 유럽연합(EU)까지 철강 무역장벽을 높이면서, 국내 철강업계가 이중고에 빠졌다. 내수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주요 수출 시장인 EU마저 빗장을 걸어 잠글 조짐을 보이자, 업계는 ‘사면초가’에 놓였다며 긴급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EU가 7일(현지시간) 발표한 신규 철강 관세율할당제(TRQ) 도입안은 철강 수입 무관세 쿼터 총량을 지난해의 절반 수준으로 축소하고, 국가별 쿼터 초과 물량에 대해 기존 관세율의 2배 수준인 최대 50%의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골자다.
산업통상부는 EU가 이번에 발표한 도입안을 그대로 시행할 경우, 철강 쿼터 총량이 기존의 세이프가드 조치보다 47% 감소한 1830만t으로 축소될 것으로 보고 있다.
세부 운영 방안은 향후 국가별 협상을 통해 확정될 예정이다. 하지만 총량 감소에 따라 한국 역시 쿼터 물량이 줄어들 것이 확실시된다. 이에 업계의 불안감은 극에 달하고 있다.
한국철강협회 관계자는 “미국에 이어 EU까지 수입 규제에 나서면서 철강 산업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며 “정확한 쿼터 감소량이나 품목별 영향이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부정적 영향이 불가피한 만큼 업계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고 전했다.
세계철강협회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해 조강 기준 6361만t의 철강을 생산하면서 전 세계 6위 철강 생산국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생산량 자체는 하락세다. 올 들어 7월까지 생산량은 3600만t으로 전년 동기 대비 2.8% 하락했다.
중국발 저가 공세와 공급과잉으로 인해 국내 산업 경쟁력이 전반적으로 하락한 데다 미국의 고율 품목관세까지 겹치면서 이미 업계에는 위기가 감지된 지 오래다.
이 때문에 유럽연합(EU)은 국내 철강 업계에 있어,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중요한 핵심 시장으로 꼽힌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작년 한국의 EU 철강 수출은 44억8000만달러(약 6조3000억원) 규모로, 단일 국가 기준 1위 수출시장인 미국(43억5000만달러)과 1·2위를 다투는 수준이다. 전체 철강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3.5%에 달한다.
게다가 부가가치가 높은 자동차 강판, 고급 가전용 외판재 등이 주력 수출 품목이다. 이 때문에 이번 EU의 수입 규제 강화는 단순한 수출 물량 감소를 넘어, 고부가가치 제품 판매 위축에 따른 수익성 악화와 미래 성장 전략의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특히 EU는 자동차 강판과 같은 고부가가치 제품의 핵심 수출 시장인 만큼, 향후 정부가 협상 과정에서 이들 품목에 대한 수출 쿼터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업계도 정부와 긴밀히 공조하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세부 운영 방안이 아직 나오지 않았고 향후 개별 국가와의 협상도 거쳐야 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지만, 결코 쉬운 상황은 아니다”며 “EU가 매우 중요한 시장인 만큼, 사태 추이를 예의주시하며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기존에 한국에 주어졌던 철강 쿼터가 이미 지난 8월 소진된 것으로 나타나면서 TRQ 도입안과 함께 한국의 유럽 철강 수출이 더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영국 시장 가격 조사 업체 아르거스에 따르면 지난 8월 기준 자동차 프레임·건설 자재에 사용되는 ‘열간 압연 강판·강대’ 부문의 한국 쿼터 16만3078t은 이미 100% 찼다. ‘냉간 압연 강판’의 쿼터 9만5726t도 65%, 후판은 쿼터 11만1358t의 83%가 소진된 상태다. 쿼터가 절반으로 줄어들면 관세를 면제받을 수 있는 철강 물량도 줄어들게 된다.
철강 가격이 오르면 수요도 감소할 전망이다.
경제협력개발국(OECD) 철강위원회와 포스코경영연구원 등은 열연 강판 기준 가격이 10% 상승할 경우 글로벌 수요가 약 2% 감소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철강업계는 내년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의 본격 시행도 앞두고 있어 대미 수출에 이어 EU 수출에 적신호가 들어올 것이란 분석이다.
CBAM은 탄소를 많이 배출해 생산된 제품을 EU로 수입할 때 EU 안에서와 같은 수준의 탄소 비용을 부과하는 제도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성장이니셔티브(SGI)는 CBAM 도입 이후 국내 철강 부문이 감당해야 할 비용이 2026년 851억원 수준에서 점차 증가해 2034년부터 5500억원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