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의 풍미는 증류(distillation)에서 결정된다. 곡물을 발효한 액체(워시)를 끓여 기화시킨 뒤 다시 응축해 도수 높은 알코올을 뽑아내는 과정이다. 불순물을 걷어내고 정수만 남기는 이 기술은 오랜 시간 공들여야 얻을 수 있는 장인의 영역이다. 스코틀랜드 전통 증류소에서는 여전히 구리로 만든 거대한 단식 증류기(pot still)를 활용해 ‘기다림의 미학’으로 몰트위스키를 빚어낸다.
21세기 인공지능(AI) 시대에 또 다른 의미의 증류가 반갑지 않은 단어로 떠올랐다. AI 증류는 원래 대형 모델의 지식을 소형 모델에 압축·전수하는 기법이다. 스승 모델이 내놓은 답변을 제자 모델이 반복 학습하는 방식으로 짧은 시간에 적은 자원으로 높은 성능을 낼 수 있게 돕는다. 회사 내에서 자체적으로 활용하면 효율을 높이는 정당한 기술이지만, 다른 회사의 기술을 베끼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한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최근 중국 기업이 자국 AI 기술을 훔치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은 “주로 중국에 기반을 둔 해외 세력이 미국 최첨단 AI 시스템을 대상으로 ‘산업적 규모의 증류’를 벌인다는 정보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AI 모델 클로드로 유명한 미국 앤스로픽은 딥시크·문샷AI·미니맥스 등 중국 3개사를 자사 모델 증류 혐의로 지목하기도 했다. 오픈AI도 딥시크가 자사 챗GPT 답변을 학습에 썼다는 증거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 AI 회사가 증류 기법을 쓰는 데는 구조적 이유도 있다.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로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 확보가 막힌 상황에서 증류는 상대적으로 적은 자원과 비용으로 경쟁력 있는 모델을 만드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드웨어 봉쇄를 소프트웨어 꼼수로 뚫고 있는 것이다.
기술 패권 경쟁은 이제 ‘데이터 주권’ 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AI 불법 증류는 미·중 간 갈등을 넘어 글로벌 이슈가 될 것이다. 정당한 대가 없이 남의 기술을 복제해가는 행태는 당연히 허용될 수 없다. 공들여 발효하고, 솥을 씻고, 불을 지피는 과정 없이 잘 끓여 놓은 원액만 쏙 훔쳐 가는 격이다.
안정락 논설위원 jr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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