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서구’는 허구다… 단일문명 아닌데도 꿰맞춘 신화

5 hours ago 4

‘서양 문명’ 개념 자체가 유동적…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간 가지
17세기 들어 서구-비서구 구분… 제국주의 정당화 수단으로 활용
◇만들어진 서양/니샤 맥 스위니 지음·이재훈 옮김/584쪽·3만3000원·열린책들

헤로도토스. 열린책들 제공

헤로도토스. 열린책들 제공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 그가 펴낸 책 ‘역사’는 오늘날 서양 최초의 역사서로 여겨진다. 또한 ‘서구 문명’이 그리스·로마에서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 유럽과 미국으로 이어졌음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책 ‘만들어진 서양’에 따르면 헤로도토스는 오히려 정반대의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은 자신을 유럽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도 우스꽝스럽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서양이 ‘단일한 문명’이라는 기존 통념에 도전장을 내미는 책이다. 역사는 “해석과 권력에 의해 재구성된 결과물에 불과하다”며 서구 문명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기틀이 환상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저자는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고전 고고학을 가르치는 영국 출신 교수. 주석과 참고문헌을 담은 분량만 78쪽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자료와 근거를 토대로 이 책을 썼다.

책은 서양 문명의 경계선 혹은 주변부에 있던 역사적 인물 14명을 들여다보면서 서양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한다.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총애한 손녀이자 아시아계 유럽인이었던 리빌라, 십자군에 멸망한 동로마의 망명국 ‘니케아’의 황제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미국의 탈식민주의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 등이다.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이들의 삶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대목은 서양이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유동적일 수도 있단 점이다.

흔히 단일하다고 믿는 서구 문명의 계보가, 실은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간 가지’라는 시점은 무척 흥미롭다. “이성적 사고 등 유럽의 유산으로 여겨지는 것은 사실 동방에서도 발전한 개념”이라고 한다. 그 예시로 아랍 최초의 철학자 알킨디 등을 거론한다. 오늘날 서구와 비서구를 구분 짓는 개념도 17∼18세기에 이르러서야 확산했다고 봤다. “서양 우월주의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철학적, 이념적 근거로 활용되기 적합했기 때문”이다.

영화 ‘300’의 한 장면. 신간 ‘만들어진 서양’은 이 영화에 대해 “스파르타인은 흰 피부에 자유를 사랑하는 유럽인으로 묘사한 반면, 페르시아인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육체적으로도 기형인 아시아·아프리카인으로 묘사했다”고 지적한다. 워너브러더스 제공

영화 ‘300’의 한 장면. 신간 ‘만들어진 서양’은 이 영화에 대해 “스파르타인은 흰 피부에 자유를 사랑하는 유럽인으로 묘사한 반면, 페르시아인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육체적으로도 기형인 아시아·아프리카인으로 묘사했다”고 지적한다. 워너브러더스 제공
두꺼운 역사서지만 기승전결을 압축적으로 갖춘 이야기들로 이뤄져 술술 읽힌다. 서두마다 담긴 인물 및 상황 묘사는 단편 소설에 맞먹을 정도로 몰입감 있다. 특히 훗날 기독교로 개종하면서까지 유럽 군주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려 했던 앙골라의 용맹한 여왕 ‘은징가’가 포르투갈 총독을 처음 마주하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었다.“은징가는 자신더러 앉으라고 준비된, 우단 깔린 마룻바닥을 경멸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는 여성 수행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수행원은 주저 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포르투갈 대표를 굴욕적으로 올려다보는 대신 은징가는 그렇게 ‘인간 의자’에 앉아 그와 대등한 눈높이에서 협상을 시작했다.” 책은 지구적 혼란이 가중된 현 시대에 대해 여러 생각거리를 남긴다. 2022년 발발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안갯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2023년 터진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은 복잡하게 얽히며 지난달 미국의 이란 본토 공습으로까지 치달았다. 훗날 이런 역사들은 어떻게 쓰이고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역사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쓰이는 것”이며 “역사를 다시 쓰지 않겠다는 선택 역시 정치적 행동”이란 저자의 말이 가슴 한편을 묵직하게 짓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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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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