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배신의 아이콘? 알고 보면 의리파!

2 hours ago 3

흡혈박쥐, 3일간 피 못 마시면 아사
사냥 서툰 어린 개체들 허탕 치면
동료들이 서로 먹이 나눠주며 생존
매년 같은 꽃 찾아가 수분 돕기도
◇천재 박쥐/요시 요벨 지음·조은영 옮김/464쪽·2만6000원·어크로스


흡혈박쥐는 매일 밤 자기 몸무게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약 15mL의 피를 마신다. 먹잇감은 대부분 소다. 유람선 갑판 위에서 낮잠을 청하는 여행객도 가끔 훌륭한 끼니를 제공한다. 식사를 방해받지 않는다면, 즉 소가 꼬리를 휘젓거나 여행객이 베개를 휘둘러 내쫓지 않는다면 한 번의 식사로 그 양을 채운다.

흡혈박쥐는 자연에 ‘상호주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실은 연속으로 3일 동안 먹이를 찾지 못한 박쥐는 아사할 가능성이 크다. 밤새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온 박쥐들 가운데 약 20%는 배를 채우지 못한 채 귀환한다. 특히 사냥이 서툰 두 살 미만의 어린 개체들은 허탕을 치는 일이 더 잦다. 이때 놀랍게도, 흡혈박쥐들은 서로 먹이를 나누며 생존한다.

군락 내 먹이 공유 네트워크를 분석한 결과, 흡혈박쥐는 아무에게나 피를 나눠 주지 않았다. 과거 자신에게 피를 나눠 준 동료에게 우선적으로 도움을 건넸다. 말하자면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다. 반대로 받기만 하고 베풀지 않는 ‘사기꾼’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체가 드러나 결국 아무에게도 도움받지 못한 채 집단에서 사실상 배제됐다. 이 연구는 1984년 학술지 ‘네이처’에 실렸으며, 오늘날까지도 흡혈박쥐는 자연의 상호 이타주의를 설명하는 사례로 꼽힌다.

이스라엘 텔아비브대 동물학과 및 신경과학대학원 교수이자 세계적인 박쥐 연구자인 저자의 신간은 마치 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의 ‘박쥐 편’을 글로 옮겨놓은 듯한 책이다. 박쥐의 세계를 생생하게 소개하는 한편, 이를 연구하기 위해 동굴과 밀림을 누비는 과학자들의 모험담도 들려준다.

박쥐의 놀라운 능력은 동료에게 먹이를 나눠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소리로 물체의 형태를 구분하고, 수백만 마리가 한 동굴에 살면서도 서로의 목소리를 정확히 구별한다. 같은 크기의 생쥐보다 20배 이상 오래 살며, 강인한 면역 체계는 현대 의학이 주목하는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점은 음성학습 능력이다. 음성학습은 인간 언어의 핵심 특징 가운데 하나. 아기는 부모의 말을 들으며 발성을 익힌다. 반면 자연계에서 음성학습은 드문 능력이다. 다른 개의 짖는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한 강아지도 다른 개와 똑같이 짖고, 원숭이 역시 음성학습 능력이 제한적이다. 그러나 박쥐는 다르다. 연구진이 새끼 박쥐에게 높낮이를 인위적으로 조절한 소리를 들려준 뒤 몇 달 후 울음소리를 분석하자, 새끼들은 어미의 소리와 실험용 스피커에서 들은 소리가 섞인 발성을 하고 있었다. 인간으로 치면 성장 환경에 따라 억양과 말투가 달라지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흔히 박쥐를 어둡고 불길한 동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박쥐는 하룻밤에 수천 마리의 모기와 해충을 먹어 치워, 매년 수십억 달러 규모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다. 또 수백 그루의 나무 위치를 기억해 해마다 같은 꽃을 찾아가 수분을 돕는 생태계의 조용한 파수꾼이기도 하다. 뭣보다 협력과 의사소통, 장수와 면역의 비밀을 품은 진화의 경이로운 실험체다. 박쥐의 매력에 흠뻑 빠져 볼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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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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