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렐, 빛으로 돌아오다
서울 도심 한복판, 빛의 예술가 제임스 터렐이 개인전 <The Return>으로 17년 만에 돌아왔다. 이번 전시는 페이스 갤러리 창립 65주년을 기념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총 25여 점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들은 페이스 갤러리와 오설록 티하우스에서 만날 수 있다. 제임스 터렐은 ‘내 작업은 빛에 관한 것이 아니라, 빛 그 자체다(My Work is not about light, It is light)’라고 말한다. 그는 빛의 새로운 차원을 펼쳐 보이며, 우리를 그 세계로 초대한다.
서울에 빛의 시간을 안기다
페이스 갤러리 1층과 2층에는 제임스 터렐의 대표작인 ‘글래스워크(Glassworks)’가 있다. 타원형 곡면의 조형물에 숨겨진 LED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색의 형태와 공간의 밀도를 변화시킨다. 그의 빛에는 그림자가 없다. 그의 작품에서 ‘바라본다’는 행위는 단지 시각적 경험을 넘어 다차원적인 체험을 의미한다.
2000년에 완성하고 싶었던 그의 야심작 ‘로덴 크레이터(Roden Crater)’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지만, 전시에서 그가 스케치한 드로잉, 판화, 사진 작업으로 만날 수 있다. 16세에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한 그는 대학에서 인지심리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하늘을 비행하며 마주한 빛과 공간의 경험은 고차원적인 세계로 관람객들을 안내하는 작품을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미국 애리조나에 위치한 40만 년 된 3마일 폭의 분화구, 로덴 크레이터였다. 그는 내부가 원뿔을 이루는 이 분화구를 거대한 육안 관측소로 재창조하고자 했다. 1970년대부터 이어진 이 대규모 프로젝트는 하늘의 빛을 땅에 새기려는 시도로, 반세기 가까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아있다.
3층에 위치한 ‘웨지워크(Wedgework,2025)’ 시리즈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공간 맞춤형 설치로 구성된 이 작품은 작가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어두운 방과 문틈 사이로 스며든 빛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그는 그 순간을 강렬한 인상으로 각인했고, 이를 공간 속에 형상화한 작업이 웨지워크다. 시간대별로 제한된 인원만 입장할 수 있는 이 공간에서 관객들은 암흑 속 미세하게 변화하는 빛의 흐름을 감상한다. 갤러리 특성상 도심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간혹 들리는 자동차 소리와 소음도 마치 작품의 일부가 된다. 붉고 푸른빛을 중심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이 평면을 따라 교차하며, 어둠을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오설록 티하우스, 차로 이어지는 빛의 여운
건물 1층에는 오설록 티하우스가 함께 자리한다. 제임스 터렐은 내한 당시 이곳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티하우스 내부에는 마름모형의 ‘글래스워크(Glassworks)’와 ‘프로젝션 피스(Projection Piece)’ 드로잉 원화가 전시되어 있으며, 관람객들은 페이스 갤러리에서 감상한 작품의 여운을 티와 함께 즐기며 이어 나갈 수 있다.
오설록은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웨지워크 칵테일 앤 딜라이트’라는 <티 세트(Tea Set)>를 선보인다. 타원형 쟁반은 1층에서 마주한 원형 패널을 연상시키며, 그 위에 놓인 웨지워크 모티브의 음료는 마치 작품 속에 또 다른 작품이 놓인 듯한 인상을 준다.
티 칵테일은 작품의 구조를 본뜬 정육면체 얼음이 담긴 잔 위에 푸른색 시럽을 천천히 부어 완성된다. 얼음 사이로 서서히 스며드는 푸른색의 움직임은 웨지워크에서 경험한 빛의 변화를 떠올리게 한다. 차는 은은한 얼그레이 향에 유자와 바닐라가 더해져 입안에서 부드럽고 향긋한 풍미가 감돈다. 본래 오설록의 ‘시그니처 얼그레이 티’에는 베르가못이 들어가지만, 이번에는 유자로 변주된다. 짙은 향과 색을 덜어낸 대신 유자의 섬세한 산미와 옅은 빛깔이 피어나면서, 작가의 글래스워크에서 마주한 안개 같은 채도의 빛과 겹쳐진다.
양갱은 빛깔을 품었다. 투명한 크리스탈 젤리 속에 웨지워크를 모티브로 한 핑크빛 오미자-애플 앙금이 은은하게 퍼져있다. 촉촉한 젤리와 앙금이 어우러져 단맛이 잔잔하게 맴돈다. 흔히 맛보는 양갱이 팥의 진한 단맛을 강조한다면, 이 디저트는 은근히 스며드는 단맛으로 마치 터렐의 빛처럼 맑고 투명한 인상을 남긴다.
오설록 티하우스를 방문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작품을 기록으로 남기고 차 한잔을 즐기면서 전시의 여운은 한층 깊어진다. 제임스 터렐의 전시를 더욱 입체적으로 느끼고 싶다면, 이 공간을 잠시 들러 보길 권한다.
김현정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