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가을 풍경에 다소 낯설지만, 어딘가 향수를 자극하는 기운이 번지고 있다. 지난 9월 26일부터 10월 25일까지, ‘홍콩위크 2025’가 펼쳐지며 홍콩의 무용, 음악, 영화, 회화가 서울의 밤과 낮을 채운다. 익숙한 거리 위로 다른 도시의 숨결이 스며드는 순간이다. 그 시작을 알린 것은 ‘홍콩위크 사전 프로그램’으로,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우관중: 흑과 백 사이>(2025.7.25.~10.19) 전시였다. 이번 전시는 홍콩예술박물관이 소장한 중국 현대미술의 거장 우관중(吴冠中)의 대표작 17점을 공개하며, 그가 흑과 백, 추상과 구상,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넘나들며 구축한 예술 세계를 선보였다. 우관중은 생존한 중국 작가 최초로 대영박물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전통 수묵화와 서양의 모더니즘 기법을 결합한 독특한 화풍으로 세계적인 찬사를 얻은 예술인이다.
이번 예술의전당 전시가 우관중의 흑백 수묵화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중국에서 만났던 그의 전시는 한층 더 풍부한 색감의 수묵 세계를 펼쳐 보였다. 먹빛의 농담이 사유의 깊이를 전한다면, 색채는 그 사유가 세상과 만나는 빛의 흔적처럼 느껴진다. 우관중에게 ‘먹’은 근원에 닿는 언어였고, ‘빛’은 그 언어가 생명으로 번져나가는 숨결이었다.
중국미술관에서 맞이한 우관중 탄생 100주년
2019년 4월, 우관중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중국미술관과 칭화대학교가 공동 주관한 ‘중국미술관 클래식 시리즈’ 중 하나인 <끊어지지 않은 연(风筝不断线)–우관중 탄생 100주년 기념전>(2019.4.25.~5.5)이 중국미술관에서 열렸다. 총 58점의 작품이 ‘생명의 본질’, ‘자연의 의미’, ‘순수한 마음’이라는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해당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작품은 중국 대표 소설가 루쉰이 눈을 감고 잡초 속에 누워있는 모습을 그린 《야초(野草)》였다. 루쉰이 남긴 동명의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야초는 뿌리가 깊지 않고, 꽃과 잎이 화려하지 않지만, 이슬을 마시고 죽은 이들의 피와 살을 흡수하며 생명을 이어간다. 그 생존조차 짓밟혀 죽음과 부패에 이르지만, 나는 이 한 무더기의 야초를 밝음과 어둠,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의 경계 위에서 증거로 바친다.”
우관중은 바로 이 구절에 깊은 감명을 받아 생명과 예술, 존재와 소멸에 대한 사유를 《야초(野草)》에 담아냈다. 이 작품 앞에서 중국 문예의 두 거장이 주고받은 울림을 마주하며, 예술이 시대와 장르를 가로질러 어떻게 전승되는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전시 제목인 '끊어지지 않은 연'은 우관중이 평생 강조해온 예술 가치관이기도 하다. 그는 1983년 문학잡지 <문예연구(文艺研究)>에 실은 글에서 예술 창작을 '연'에 비유하며, "예술가는 삶에서 얻은 감정과 경험을 재료 삼아 이를 추상화하지만, 그 연의 줄이 현실과의 연결을 잃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즉, 그에게 '연'은 예술과 삶을 이어주며, 대중과 교감하기 위한 매개체였던 것이다. 그는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조화’의 미학을 추구했는데, 자연과 마음, 사물의 형상과 내면의 형상이 그의 순수한 정신 속에서 정제되고 승화되어 예술미로 거듭났다.
중국미술관에서 열린 우관중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는 작가의 후기 대표작 가운데, 점과 선으로 생명의 리듬과 자연의 질서를 표현한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그중 《파종(播)》과 《건루곡(建楼曲)》은 단순한 형식 속에서도 생명이 자라나는 듯한 에너지와 생동감을 전하며, 전통 수묵을 현대적 감각으로 확장한 우관중의 화풍을 보여준다.
칭화대학교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우관중
1960년대, 우관중은 칭화대학교 미술대학의 전신(前身)인 중앙공예미술학교(中央工艺美术学院)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중국 근현대 예술 교육의 초석을 다졌다. 칭화대학교(清华大学)는 중국을 대표하는 명문대학교이자, 과학기술뿐 아니라 미술 분야에서도 중요한 전통을 이어온 대학이다. 그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칭화대학교에는 그의 예술 세계를 연구하는 전문 기관인 ‘우관중 예술연구센터’가 설립되었다.
또한, 칭화대학교 예술박물관에서는 매년 그의 소장품 전시를 열어 그 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시는 대체로 개인전보다는 우관중과 인연을 맺은 예술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예술을 조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동시대 미술가이자 예술 교육 동료인 축대년(祝大年,1913–1996)과 우관중의 공동전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다(向美而行)>, 그리고 우관중과 그의 스승 임풍면(林风眠,1900-1991)의 예술적 연계를 조망한 <현대 예술의 길(现代艺术之路)> 등 전시가 그 대표적인 예다. 한 해가 저물 무렵이면, 우관중의 작품을 마주하기 위해 칭화대학교 예술박물관을 찾곤 했다.
그중에서도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항구의 모습이 연상되는 《영춘(迎春)》과 《항구의 아침 햇살(海港晨曦)》은 추상적인 구성 속에서도 인간적인 온기가 전해졌다. 특히 해외 생활이 녹록지 않게 느껴질 때면, 이러한 그림들이 마치 ‘따뜻한 추상화’처럼 마음에 묘한 위안을 건네는 듯했다. 그의 시선으로 포착한 홍콩의 야경,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 지베르니의 풍경들은 각기 다른 도시의 빛을 품은 듯, 여행자의 눈으로 세상을 노래하는 회화적 일기처럼 다가왔다.
중국의 주요 시립 미술관을 방문하다 보면, 전시의 주제를 막론하고 어딘가에서 늘 우관중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 그의 예술이 중국 미술의 역사와 공간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음을 실감하며 동시에 묘한 반가움이 일렁인다. 이번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그의 한국 첫 단독전은 그 오랜 예술적 호흡이 국경을 넘어 한국에 닿은 의미 있는 계기였다. 앞으로 더 많은 전시를 통해, 우관중이 남긴 색채와 사유의 깊이를 국내에서도 꾸준히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배혜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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