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지자체 재량” 판단 불복
특별법 개정 추진해 뒤집기 시사
“소급입법 위헌” 법학계 경고에도
장관 “모든 수단 강구해 막을 것”
보존·개발 전통적 충돌이슈인데
‘어좌’앉은 김건희 여사 빗대
서울시 공격하며 정치쟁점화
“등록유산에 자해행위” 비판도
대법원이 서울시의 ‘문화재보호구역 밖 고층 개발 규제 완화’ 조례 개정을 적법하다고 판단한 지 불과 하루 만에 문화체육관광부와 국가유산청이 사실상 ‘불복 모드’로 전환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서울 종묘 맞은편에 고층 건물이 들어설 수 없도록 모든 조치를 검토하겠다고 강경 예고한 것이다.
하루 전 “법원 판결을 존중한다”고 했던 문체부와 국가유산청이 ‘법령 개정과 특별법 제정’을 검토하겠다며 사실상 소급 입법을 예고한 데다 오세훈 서울시장을 겨냥해 독설을 퍼부으면서 사실상 정쟁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7일 종묘 정전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장관으로서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에 같이 참석한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험 목록’에 오를 수 있다”고 다시 한번 경고했다.
최 장관과 허 청장의 이날 ‘종묘 회견’은 예정에 없던 일정이었다. 문체부 관계자는 “이날 오전 장관이 회견을 자청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당시의 유네스코 측 권고 사항에 따라 세계유산 지위가 상실될 위기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아 직접 회견을 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최 장관이 국가유산청에 ‘법령의 제·개정’을 강도 높게 주문하면서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문화유산법)’ ‘세계유산의 보존·관리 및 활용에 관한 특별법(세계유산법)’ 등 관련 법령 개정과 새 법령 제정이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국가유산청은 서울시의 세운4구역 높이 계획을 변경하는 과정에서 세계유산영향평가를 반드시 이행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난해 11월부터 세계유산영향평가를 하도록 명문화한 세계유산법이 시행되고 있다.
국가유산청은 세계유산영향평가의 대상 사업과 평가 항목, 절차 등을 규정하는 시행령 개정안도 마련해 입법 예고했다. 하지만 해당 개정안은 현재 부처 협의 과정에서 계류 중이다. 시행령 개정안을 조속히 확정·공포해 종묘 앞에 지어지는 142m 고층 빌딩을 막겠다는 생각으로 보인다.
그러나 법학자들은 이미 확정된 사법 판단에 소급 적용되는 법률은 위헌 소지가 크다고 본다. 서울시는 지난달 30일 세운4구역의 높이 계획을 변경하는 내용을 담은 ‘세운정비촉진지구 및 4구역 재정비촉진계획 결정(변경) 및 지형도면’을 고시했다.
이번 고시로 재개발 계획이 공식 확정됐는데, 나중에 만들어진 세계유산법 시행령을 적용하는 것은 법률 불소급 원칙에 반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대법원도 지난 6일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밖에선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규제를 완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세운4지구는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밖에 있다.
한 행정법 전문가는 “법원이 ‘지자체 재량’으로 결론을 내린 사안을 입법으로 재차 규제하면 권력 분립 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장관이 기업인 출신이라 행정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권한 밖 유산영향평가에 대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어났다.
공주시가 지난해 법적 근거가 없는데도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된 공주 공산성 인근 신관동 옛 버스터미널 용지가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밖에 있는데도 유산영향평가를 진행해 주민들의 반발이 컸다. 이에 작년 박수현 민주당 의원은 “법적 근거가 없어도 지자체 요청으로 유산영향평가가 진행됐다면 지자체가 입장을 변경해 평가를 생략하는 것도 가능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행정부 수장이 전통적인 역사 보존과 개발의 충돌 문제를 정쟁화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커진다.
이날 최 장관은 회견에서 “권력을 좀 가졌다고 해서 마치 자기 집 안방처럼 드나들면서 어좌에 앉고 좌담회를 하고 이렇게 우리 문화, 우리 소중한 문화유산이 처참하게 능욕을 당한 것이 바로 엊그제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2023년 9월 12일 윤석열 전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경복궁 근정전을 방문했을 당시 어좌에 앉은 일을 언급한 것인데, 오 시장이 권한을 휘두른다며 김 여사에 빗대 공격한 것이다.
전문가들을 규제기관과 지자체가 충돌하기다는 공존 가능한 개발 방향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강조한다. 종묘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모든 방향에서 건물이 보이지 않도록 규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지엽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는 “종묘 보존의 핵심은 상징적인 경관을 지키는 것”이라며 “궁궐과 산으로 연결되는 북쪽 경관은 지키고, 세운지구 등 빌딩이 펼쳐진 남측은 녹지 공간이나 전망대 등을 설치해 시민이 종묘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문체부와 국가유산청의 이런 쟁점화 시도가 오히려 ‘자해 행위’라는 비판을 내놓는다. 유네스코는 등록 유산의 ‘보호 의지’도 중요하게 평가하지만 유산을 ‘정치 분쟁화’하는 것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날 오 시장은 페이스북에 “세운지구를 비롯한 종묘 일대는 서울 중심임에도 오랫동안 낙후된 채 방치돼 말 그대로 폐허나 다름 없는 상태”라며 “세운지역 재개발 사업은 종묘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English (U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