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치는 안데르센의 ‘벌거숭이 임금님’의 풍자를 떠올리게 하는 소극들로 가득하다. 정직하지도 똑똑하지도 않으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정치인들의 민낯이 국민들 앞에 무방비로 발가벗겨진 동화 속 황제와 오버랩된다.
온갖 곡절 끝에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확정된 김문수부터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진짜 저런 사람인 줄 몰랐다”며 혀를 차는 사람들이 많다. 단일화 약속을 무참하게 외면하면서 청렴하고 반듯한 이미지는 한순간에 구겨졌다. 평생 관료로 살면서 온화하고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들어온 한덕수 전 대통령 권한대행은 졸지에 새벽 3시20분 후보 탈취 쿠데타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그런 사람을 업고 의원과 당원들 사이를 종횡무진한 권영세-권성동은 기본 판단력은 그만두고서라도 누구 말대로 알량한 정치력 밑천을 바닥까지 드러냈다.
당원들까지 손가락질을 하는 마당에 지지율 타격이 없을 리 없다. 이제 대선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고 보수진영은 궤멸적 위기를 맞았다는 한숨과 탄식이 자욱하다. 보수의 유일한 희망은 ‘반(反)이재명’ 결집이다. 하지만 “무엇을 하겠다”가 아니라 “절대 누구는 안 된다”는 식의 선거는 이제 식상해졌다. 더욱이 이 구호는 3년 전 대선에서 한 번 써먹었던 것이다. 유권자들은 어느새 내성이 생긴 듯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알고 있어도 개의치 않겠다는 이들이 많다. 시시각각 조여 오던 온갖 사법 리스크를 방탄 입법과 사법부 공격으로 되치기하는 데 성공한, 그야말로 반전의 생존 서사를 응원하는 기류까지 생겨났다. 급기야 정규재 조갑제 씨 같은 보수 논객들을 끌어안는 최고의 정치력을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후보 또한 안데르센의 동화적 풍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의 허물에 대해 정직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보수 와해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도 할 말이 많다. 그들은 ‘이재명 현상’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젊은 여성들이 혐오할 만한 소문과 이력을 갖고 있는데도 현실은 오히려 반대다. 우리 선거는 언젠가부터 정강·정책이 아닌 단기 흥행, 이념이 아닌 취향적 선택으로 변질됐다. 이재명을 지지하는 취향은 오랫동안 유권자들 마음에 무언가가 축적된 결과다. 그것의 근원은 “국힘은 더 싫다”는 것이다. 그냥 싫다는데 무슨 구구절절 이유가 있겠나.
사람들이 자유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보수적 이념 자체를 거부하거나 경원시하는 것은 아니다. 점진적 개혁을 내건 보수는 급진성을 앞세운 진보보다 멋지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높은 도덕성과 품격, 자기희생과 책임의식이 뒷받침된다면 일시적 유행이나 취향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힘과 호소력을 갖는다. 국힘은 바로 이 지점에서 국민 지지를 잃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부인 때문에 총선을 망치고도 폭주를 거듭했다. 만약 비상계엄을 선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이 후보의 정치생명이 끝났을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권력의 독선과 오만에 취한 탓이다. “저쪽은 가만 놔둬도 제풀에 자빠진다”는 이 후보의 조롱 그대로다.
국힘은 모래알 같은 조직이다. 지도력뿐만 아니라 추종력도 그렇다. 보수진영 전체가 벌거숭이 임금님들의 각자도생에 빠져 있다. 지역에서 누릴 것 다 누린 홍준표 같은 사람이 사방에 삿대질을 한다. 대선 후보까지 뛴 사람이 자신이 먹던 우물에 침을 뱉는 심통을 부린다. 급기야 휘하 참모들은 이 후보로 말을 갈아탔다. 한때 당을 이끌었던 한동훈 쪽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김 후보가 윤 전 대통령 출당에 반대한다는 이유를 대고 있지만 그 문제가 당의 명운이 걸린 선거를 수수방관하는 이유가 될 순 없다. 그동안 말로만 ‘반이재명’을 떠들었을 뿐, 주연 아닌 조연은 싫다는 것이다.
한덕수 씨가 갑자기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겠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대선 출마까지 선언한 사람이 열흘도 지나지 않아 은퇴를 한 꼴이다. 다들 지난 총선에서 공천 탈락이라는 보복을 당하고도 묵묵히 선거를 돕고 있는 민주당 박용진 같은 사람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나. 헌신과 희생, 선공후사와 애국심이 결여된 정치인들은 보수를 참칭할 자격이 없다. 보수는 이번 대선 결과에 관계없이 본연의 가치를 배반한 기득권을 모조리 단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