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제조업을 할 수 없는 나라다. 근로 인력부터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3억5000만 명 인구에서 제조업 종사자 수는 1280만 명에 그친다. 전체 인구의 3.6%로, 440만 명의 제조인력을 보유한 한국(8.5%)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근로자 임금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균 시급 4만원이 넘는다.
여기에 노동자들의 고령화까지 겹쳤다. 한국도 비슷한 사정이긴 하지만, 미국 청년들은 더 이상 공장에서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현지 언론들조차 “미국 청년들이 안락함에 스포일돼 있다”고 꼬집는다. 수십 년에 걸쳐 제조업 주도권이 아시아로 넘어오는 사이에 기술 생태계도 거의 붕괴된 상태다. 첨단산업의 건설·제조인력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다. 이 와중에 반이민 정책을 펼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바닥 현장을 받치던 외국인 근로자들을 노골적으로 배척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한국인 근로자 체포·구금 사태는 배덕적이다. 자신들의 제조업 부흥에 투입된 사람들을 중범죄자 소탕하듯이 능멸했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배신감 이면에는 미국을 상대로 한 응석받이식 태도도 없다고 볼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우리 기업들과 정부의 책임도 크다. 비자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직원들을 내보낸 기업이나 지난 십수 년간 이런 상태를 방치한 외교당국의 무사안일은 자업자득의 소지가 분명하다. 미국이 동맹국 사정을 알아서 봐주겠거니 하는 따위의 만심이었을 것이다. 비자 규정을 착실히 지켜온 일본 기업들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분노와 흥분이 가라앉고 나면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몇 가지 근본적 문제를 깨닫게 된다. 이렇게 무리해가면서까지 미국에 투자를 해야 하는 것일까. 한국 기업들이 최근 몇 년간 미국 공장 건설에 쏟아부은 돈은 1000억달러가 넘는다. 한·미 관세협상 타결로 약속한 투자금은 물경 3500억달러다. 우리나라가 지난 60여 년간 미국 시장에서 거둬들인 누적 무역흑자 4500억달러를 그야말로 한방에 털어 넣는 규모다. 그래서 앞으로가 더 문제다. 당장 기술 인력 파견과 현지 인력 조달에 비상등이 켜졌다. 인건비 상승과 공기 연장에 따른 고비용 구조가 만성화될 가능성이 있다.
그동안 중국 베트남 등 개발도상국을 제조기지로 삼아온 한국 기업들로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위험이다. 나중에 채산성을 맞추고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은 또 다른 난제다. 중국 기업들을 배제하더라도 자동차 반도체 배터리 모두 유럽과 일본의 강자들이 건재할 뿐만 아니라 그들도 미국에 공장을 짓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다. 이재명 대통령 말대로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는 말은 이제 의미가 없다. 이미 ‘미국 올인’이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마당이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것이 투자의 정석이라지만 지금은 전통적 규칙이 통하지 않는 시대다. 대미 투자가 실패하면 우리 산업의 미래도 없다. 1년에 30조원 이상의 관세를 물면서 매년 50조원, 100조원의 뭉칫돈을 넣어야 할 판이다. 이렇게 값비싼 비용을 들이고도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한국은 그저 미국에 공장만 헌납한 꼴이 되고 만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기업들은 결사적이다. 삼성전자는 테일러 공장 완공에 맞춰 테슬라의 고성능 칩을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자칫 일감이 없어 공장을 놀릴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타이밍이었다. 현대자동차의 사족로봇은 이제 인공지능(AI)을 장착해 스스로 물구나무서기를 할 정도로 진화했다. 조지아 공장에 투입될 휴머노이드 로봇도 첫선을 보였다. 로봇은 AI의 최종 병기다. AI 로봇에 바퀴나 날개를 달면 그게 바로 모빌리티다. 제조 불모지 미국에 첨단 공장을 짓는 일은 그 자체로 미래 산업을 일구고 키우는 전략과 맞닿아 있다. 잘만 하면 인력 부족이나 생산성 문제까지 해결하는 일석이조, 삼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전 세계 시장을 종주하면서 3만달러 시대를 열었다. 이제 4만달러, 5만달러 시대는 미국 한복판에서 결판나게 생겼다. 세계 1등 제조 국가를 향한 마지막 진검승부다. 근로자들이 당한 고초가 헛되지 않도록 반드시 대미 투자를 성공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