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조선’ 펴낸 진재교 교수
“중간계층, 신문물 체험뒤 도입 건의
‘지식 주체’ 자처한 사대부들은 무시
정보 등 차단 세계 흐름에 무뎌져”
조선 후기 지식 정보의 생성과 유통을 문화사회학적으로 조명한 책 ‘지식과 조선’(성균관대 출판부)을 최근 펴낸 진재교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64·전 동아시아학술원장)는 지난달 30일 연구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이번 책에서 진 교수는 조선 후기 지식의 주요 유입 경로인 사행(使行)에 주목했다. 실록엔 1631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1581∼1642)이 돌아와 천리경(망원경)과 서포(西砲), 자명종 등 서구의 물건을 대거 바쳤다고 나온다. 그는 명에 와 있던 로드리게스 신부(1559∼1663)를 만나 신식 화포 같은 물건을 얻었다. 하지만 진 교수에 따르면 신부와의 만남을 주선했을 뿐 아니라 그와 더욱 깊이 교류했던 건 역관 이영후였다.
이영후가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는 각종 서구의 지식을 접하며 ‘개명의 경지’를 체험했고, 천문학과 역법의 전문 지식에 관해 질문할 정도로 이해가 깊었다. 진 교수는 “조선 지식인이 서양인과 최초로 지적 대화를 했던 것”이라며 “사행의 실무자나 수동적 존재로만 기록된 중간계층이 사실 사대부보다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문물을 직접 체험했다”고 강조했다.하지만 사대부들은 새로운 지식을 기존의 가치 질서 안에 가뒀을 뿐 확산시키진 못했다.
통신사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역관 이언진(1740∼1766)은 정사였던 조엄(1719∼1777)에게 마테오 리치 신부의 천주교 포교와 서구 문물 도입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하지만 조엄은 이를 두고 “이적(夷狄)이 중화(中華)를 어지럽히는 조짐”이라고 평가했다. 진 교수는 “자신들만이 지식의 주체이며 생성자라고 생각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신분이 낮은) 네가 알면 얼마나 아느냐’는 식으로 무시했다”며 “결국 조선은 지식과 정보가 차단됐고, 세계의 흐름에 무뎌지게 됐다”고 말했다.
이런 결과는 조선에서 공론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탓이 컸다. 조선의 공론장은 붕당과 사승(師承) 관계에 따라 종적으로 갈렸고, 지식과 정보의 횡적 확산이 차단돼 있었다. “같은 당파에 속한 여러 집안의 계보를 모은 당파보(黨派譜)를 만들고 특정 집안과는 통혼을 제한했을 뿐 아니라 벼슬을 해도 같이 숙직을 안 하려고 했을 정도니 알 만하죠.”당파와 신분을 벗어난 시회(詩會)가 있긴 했지만 사상에 관해 토론이 이뤄졌던 서양의 살롱처럼 발전하진 못했다. 국가가 출판을 장악하고 지배에 필요한 것들만 허용하며 통제한 것도 패착이었다. 영조가 왕실에 문제 되는 내용이 담긴 책을 유통한 서쾌(책장수)를 잡아 죽이거나, 정조가 새로 유행하는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요즘의 소설과 비슷한 문체)를 배척하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한 것도 공론장의 확산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진 교수는 봤다.
진 교수는 “임진왜란 뒤 중국엔 청나라가 들어서고 일본엔 에도막부가 성립됐지만 조선은 망하지 않은 채 주자학을 정치 질서화했다”며 “종적 가치가 전면화되면서 횡적 소통이 억압되고 사회가 경직적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검열과 통제를 받지 않는 공론장이 제대로 작동해야 창발적 사유가 가능해지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가능성도 열립니다. 이는 조선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마찬가지겠지요.”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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