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대통령 탄핵으로 물러나고 곧이어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정권인수위원회 없이 국정기획자문위원회라는 한 달짜리 임시 조직을 만들어 새 정부 국정운영 방향을 짰다. 당시 국정자문위를 총괄한 김진표는 위원장을 맡자마자 후배들이 일하는 기획재정부의 힘 빼기부터 나섰다. 첫 일성이 “예산권을 거머쥔 채 사회부처까지 호령하는 기재부를 손보겠다”는 것. 기재부가 노동, 복지 등 사회부처 예산을 삭감하는 걸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나 다름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재인 정부는 예산통을 연거푸 두 명(홍남기, 김동연)이나 기재부 부총리로 입각시켜 전례 없던 수준의 초팽창 예산을 짜며 노동·복지 분야에 재정을 퍼부었다. 그 결과 5년간 국가부채는 400조원 급증해 1000조원에 육박하는 기록을 세웠다.
윤석열 정부가 비정상적으로 마무리되면서 정권 탈환 가능성이 커진 더불어민주당은 또다시 기재부를 타깃으로 엄포를 놓고 있다. 과거 겁박 수준을 넘어 ‘기재부 해체론’까지 거론한다. 이재명 민주당 대통령 후보도 “기재부가 왕 노릇 하고 있다”며 어떤 식으로든 손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이미 민주당 안에선 기재부의 2분할, 3분할, 5분할 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관련 법안까지 발의돼 있다. 여기엔 이 후보의 트레이드마크인 지역화폐, 기본소득에 기재부가 번번이 퇴짜를 놓은 데 대한 반감이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대선 레이스에서 가장 앞선 이 후보가 차기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기재부 해체는 불가피할 것 같다.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시나리오는 정책 기능과 예산 편성을 떼내는 것으로 2008년 기재부 출범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과거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양대 체제가 갖춰진 1961년 이후 정권의 필요에 따라 수차례에 걸쳐 합쳐지고 쪼개지고 한 마당에 기재부를 재편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예산권을 어디가 가져가느냐다. 민주당은 대통령 직속으로 두자는 주장인데, 입법권을 장악한 정권이 예산권마저 잡으면 ‘재정의 정치화’는 불을 보듯 뻔하다. 세계 어디에도 이런 식으로 국가 예산 기능을 권력자 밑으로 둔 채 견제받지 않는 권한을 행사하는 나라는 없다.
2008년 예산 기능을 지금의 기재부로 합친 데는 이유가 있다.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맏형 부처로서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개혁을 추진하려면 다른 부처를 움직이게 해야 하고, 예산권이 그걸 실행할 수 있는 지렛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정치 포퓰리즘에 맞서 건전재정이란 보루를 지키는 역할로 기재부만 한 대안이 없다는 측면도 있다. 그래서 기재부는 매년 예산 편성 때 국가 중기재정운용계획을 내놓으며 ‘건전재정’을 제1 원칙으로 제시하고 그걸 사수하기 위해 애썼다. 실제 예산 시즌이 되면 기재부 예산실은 전쟁터나 다름없다. 예산을 조금이라도 더 따내려는 각 부처의 온갖 로비전과 거기에 맞선 예산 관료 간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예산을 가장 적극 방어한 주무과장이 그해 예산실 최우수 공무원 영예를 안는 건 오랜 전통이다.
하지만 예산권이 권력자 밑으로 가는 순간, 건전재정은 송두리째 허물어지고 예산 관료들은 정권의 ATM(현금자동인출기) 역할로 전락할 것이다. 이미 기재부는 운명을 직감한 듯 꼬리 내린 강아지 신세다. 내년 예산편성지침에 건전재정이란 단어를 쏙 뺀 것을 두고 정권이 교체될 것을 염두에 둔 자진 항복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최상목 전 부총리가 퇴임사에서 “외부 압력에 굴하지 않으려면 신념을 지킬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은 국민에 대해 책임지는 공무원이라는 자긍심에서 나온다”고 했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과거 양대 경제부처였던 산업통상자원부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기점으로 핵심 인재들이 쫓겨나고 쑥대밭이 됐듯이, 관료 그룹의 마지막 자존심인 기재부도 정권 교체와 함께 운명을 다할 것이다.
경제를 둘러싼 환경은 최악이고, 돌파구인 개혁은 멈춰 있고, 돈 쓰자는 주장은 넘쳐나고, 급기야 잠재성장률 0%대 추락 경고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이걸 막아낼 보루인 경제 관료 그룹마저 무력화된다면…. 기재부 해체는 단순한 일개 부처의 와해 수준을 넘어 우리 경제의 해체를 알리는 불길한 징조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