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힘 주류, 당권 욕심 없는 한덕수 내세우려
기본 절차 무시하고 ‘엘리트주의’ 민낯 노출
대중은 ‘억울한 약자’ 만드는 기득권에 분노
당의 대들보 서까래 무너지는 소리 안들리나
정치에서 가장 무서운 민심이 ‘동정심’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만 하루도 안 돼 한 전 총리로의 후보 교체안이 국민의힘 전 당원 조사에서 부결된 것은 이런 세간의 바닥 민심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최소한의 기본(基本)도 지키지 않은 채 새벽에 날치기하듯 멀쩡한 후보를 끌어내리고 한 전 총리를 대신 후보로 세우려 음습한 공작을 펼친 데 대한 ‘정서적 분노’가 컸던 것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국민의힘은 기득권 세력의 정당, 엘리트주의 정당임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온 힘을 쏟아 간신히 본선 무대에 올랐는데, 대의명분이니 선당후사니 하며 “네가 양보하라”고 거칠게 요구한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선발전엔 참여하지 못했지만 평소 공부도 많이 했고 유학도 했고 외국어도 잘하고 실력도 좋은 사람이 대신 나가면 좀 더 승산이 있을 수도 있는데 왜 고집을 부리느냐는 식이다. 당사자가 얼마나 억울해할 것인지에 대해선 둔감하다.
자신은 그런 무시험 전형에 올라탈 만한 예외적 인물이라고 스스로 여긴 듯한 한 전 총리의 자기중심적 우월주의도 일반 정서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그가 과도기 국정을 잘 이끌 수 있는 경륜과 역량을 갖춘 인물일지도 모르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그건 사후 평가의 영역이다. 후보 선출 과정의 절차적 정당성이 취약한데도 오히려 채권자인 듯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그런데 이른바 ‘쌍권’은 왜 초현실적인 무리수까지 두며 한 전 총리를 대선 후보로 밀어붙이려 했을까. “을지문덕” “김덕수” 운운했던 김 후보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달라졌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건 맞다. 다만 그와 별개로 단순한 상호 불신이나 감정싸움으로만 볼 수는 없는, 우리 정당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사실상의 ‘심야 쿠데타’까지 벌어졌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기획자이고 실행자인지, 드러나지 않은 배후가 있었던 건지의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한 전 총리가 단일화 확답도 없이 50년 공직 끝무렵에 불확실한 대선에 뛰어들 리는 없다. 필자는 4주 전 ‘한덕수 출마론… 얼마나 설득력 있을지’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반(反)이회창’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모델을 언급했다. … 한 대행은 자의든 타의든 ‘대선 경기장’ 옆까지는 온 듯 보인다.” 그 칼럼을 쓰기 전 ‘정치권 인사’들에게 들은 얘기는 이낙연 전 총리까지 포괄하는 훨씬 구체적인 반명 연대 구상이었다. 용산의 핵심 인사에 이어 나중엔 대통령 직속 위원회 핵심 인사들, 특정고 인맥이 관여됐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이런 흐름의 배후에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있는지는 모호하다. 그렇다는 얘기도 있고 아니란 얘기도 있지만, 솔직히 윤 전 대통령이 ‘중심 권력’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60여 명의 의원들이 ‘후보 교체’ 무리수에 동의했던 가장 큰 이유는 설령 지더라도 당권 욕심이 없는 한 전 총리가 가장 무난한 대안이라는 데 이심전심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지금 갖고 있는 기득권이라도 지키고 혹시 모를 사법 우려를 막기 위해 일단 뭉쳐야 한다는 집단 보호 본능이 작동한 것은 아닐까. 정권 교체 후 닥칠 수도 있는 사정 정국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이런 공포감이 ‘최초의 호남 후보’ ‘통상 전문가’ 등 이재명 후보에 대한 비교 우위 기대와 맞물려 한 전 총리로의 단일화에 대한 막연한 집단 희망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19세기 궁정에서나 벌어질 법한 초현실적 사건이 토요일 새벽 벌어졌다. 국민의힘 수준이자 실력이다. 그나마 뒤늦게라도 당원들의 집단 지성이 발휘된 게 다행이다. ‘기본’을 지키지 않으면 정당 민주주의의 치명적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교훈이라도 얻길 바란다. 국민의힘의 대들보와 서까래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데 이번 사태의 책임자들은 알고는 있는지….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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