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한 업무지시? 직장내 괴롭힘? 명시적 기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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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업무지시? 직장내 괴롭힘? 명시적 기준이 필요하다

직장생활의 백미라 불리던 관리자 승진의 의미와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시작된 승진 기피 현상이 민간 조직으로 확산되며, 현장 관리자들은 "을질에 시달린다"며 리더의 역할 자체를 회피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조직 내에서 상사의 정당한 통제와 지시마저 괴롭힘으로 오인되면서, 리더십의 권위는 흔들리고, 조직 운영의 기본 질서에도 균열이 생기고 있다.

실제 법원은 최근 상사에 대한 하급자의 '을질'을 괴롭힘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다수 내놓고 있다. 예컨대 메신저를 통한 욕설과 키보드로의 감정 표현(서울행정법원 2021구합74627), 조퇴 불허에 대한 집단 피켓 시위(중앙노동위원회 2022부해1388), 평판을 무기로 상사 위에 군림한 사건(서울중앙지법 2022가단5320016) 등에서 부하직원의 우위성과 괴롭힘 성립을 인정했다.

반면 고성이 오간 경우라도 업무의 필요성과 표현 방식이 적정하다면, 괴롭힘이 아니라는 판결도 이어지고 있다. 연차 사용 확인서 제출 요구(서울중앙지법 2020가합20923), 교육 중 선배 간호사의 고성 지시 등은 “권한 내 정당한 지시이자 필요성 있는 통제”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안마다 해석이 달라 현장 관리자들이 기준을 명확히 인식하고 실천하기에는 한계가 크다.

이러한 경계의 모호성은 국제적으로도 주목받는 이슈였다. 호주는 2012년 연방하원의 「Workplace Bullying: ‘We Just Want It To Stop’」 보고서를 통해 '업무상 정당한 관리행위(Reasonable Management Action)'를 법적으로 명시할 것을 권고했고, 이는 2014년 1월 1일부터 『Fair Work Amendment Act 2013』을 통해 시행됐다. 이 법은 공정노동위원회(FWC)의 지침과 함께 ‘괴롭힘이 아닌 행위’에 대한 기준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호주 공정노동위원회는 ‘합리적인 제3자 관점’에서 해당 행위가 업무상 필요하고 정당한 방식으로 이뤄졌는지를 기준으로 다음과 같은 행위들을 ‘정당한 관리행위’로 판단한다. ① 목표 설정과 평가, 피드백 제공 등 합리적인 성과관리 ② 절차에 따른 징계 및 서면 경고 ③ 인력 배치나 프로젝트 할당 ④ 조직 개편이나 직무 재배치 통보 ⑤ 일시적 갈등이나 의견 충돌 ⑥ 반복되지 않은 단일 사건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실제로 FWC에 제기되는 'stop bullying' 신청 중 다수는 이러한 기준에 따라 각하되고 있다.

기업들은 이러한 판단기준을 자율적인 인사규정에 반영하고, 'Safe Work Australia'의 지침에 따라 관리자 대상 e-러닝 콘텐츠와 체크리스트를 제공하며 예방 중심의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다. 그 결과 ‘기준 명료화 → 분쟁 예방 → 판단 일관성 → 조직 신뢰’라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되고 있다.

물론 호주의 이런 제도가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법령과 고시에서 ‘괴롭힘이 아닌 행위’를 명시하고, 중립적 판단기구가 체크리스트를 통해 1차 필터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판단의 예측 가능성과 절차적 신뢰를 높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크다.

필자가 수행한 직장 내 인식 조사에서도 “상사에게는 괴롭힘이 성립하지 않는다”, “괴로우면 괴롭힘이다”, “업무시간 외 연락은 모두 괴롭힘”이라는 상반된 인식이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중장년 남성 리더와 MZ세대 여성 부하직원 간에는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이나 기대 수준이 달라, 상시적인 긴장과 오해가 괴롭힘 사건으로 비화되는 경우도 많았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제도가 어느 한 편의 권리를 과도하게 주장하는 수단으로 전락해선 안 된다. 근로기준법 제76조의2는 사용자와 근로자 모두가 '서로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건강한 근로환경을 조성할 책무'를 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리더는 그 책임을 실천하는 핵심적 주체이며, 조직 운영의 기반이다.

우리나라도 ‘괴롭힘이 아닌 정당한 관리행위’를 분명히 명시하고, 현장에서 일관된 기준을 적용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만 '을질'에 지친 관리자도, '괴롭힘'에 상처받은 직원도, 존중과 신뢰 속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건강한 일터가 될 수 있다. 호주의 사례가 우리에게 준 교훈을 조직문화 혁신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시점이다.

문강분 행복한일노무법인·연구소 대표 / 한국괴롭힘학회 수석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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