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보그(Vogur)코리아의 1세대 스타일리스트로 패션계에서 입지를 구축해온 서영희 디자이너(64). 30여년 패션계 커리어 중 처음으로 무용수들을 위한 옷을 지었다. 그는 국립무용단이 4월 3~6일 공연하는 신작 '미인'의 의상과 오브제 디자인을 담당했다. 지난 21일, 무용수들에게 수백가지 의상과 장신구를 걸쳐보고 있던 그를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만났다.
"경험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도전을 또 하게 됐어요. 멈춰 서 있는 모델에게 옷을 입혀보는 것과 무용수들의 몸에 맞는 옷을 입히는 건 다른 차원이더라고요. 제가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양정웅 연출, 정보경 안무가 등 제작진과 계속 소통하면서 의상을 다듬어나갔습니다."
'미인'은 국립무용단의 여성 무용수로만 구성된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정교한 몸짓과 강렬한 에너지의 대비를 담아내 전통미와 동시대 감각을 넘나들겠다는 의도로 탄생한 무대다. 지름 6.5m의 대형 에어벌룬을 활용해 음과 양의 에너지를 형상화하고, 무대를 가로지르는 26m의 대형 천과 족자 형태의 LED 오브제로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미장센을 만들어낼 계획이다. 이곳에서 산조와 살풀이, 부채춤, 강강술래, 북춤, 탈춤 등 11개의 민속춤판이 벌어진다. 서영희는 이 11개의 춤에 어울리는 의상과 오브제를 기획단계에서부터 제작해 나갔다.
전통 무용에 쓰이는 한복은 서양의 의복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2D에 가까운 평면형이다. 한국 무용을 업으로 삼는 무용수들의 몸에 걸칠 의상은 일상복과는 달라야했다. 서영희는 "매일같이 몸을 움직이는 이들의 몸을 볼 때 어떠한 경지를 느꼈다"고 했다. "숨만 쉬어도 몸의 선(線)이 달라지는 사람들이었어요. 경외심이 들었고 현대적 감각을 살린 전통 무용 의상을 신나게 만들었습니다."
제작진들은 탈춤에서 탈을 없애거나 승무의 고깔에 LED 전구를 다는 등 역발상을 하며 기획 의도를 다듬어나갔다. 꼭 동작으로만 보여줘야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린 것. 예를 들면 부채춤의 부챗살은 한복 치마의 세로 주름으로 표현됐고, 살풀이 춤에서 넋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쓰던 상여 모양의 작은 상자 '넋덩삼' 속 종이 인형은 무용수들의 모자로 재탄생했다.
이번 무대는 그만큼 의상과 오브제가 무용과 대등한 위치에 올랐다는 걸 의미한다. 오뜨쿠튀르 컬렉션을 연상케하는 의상과 장신구 등 오브제를 합치면 500점. 서영희는 "의상과 오브제 형태에서 내가 영감을 받으면 안무가와 다른 제작진들이 이에 맞춰 안무를 확장해 나가고, 연출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무용에 대해 잘 아시는 고수 관객도 있겠지만, 무대 전체를 그림처럼 보러 오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에요. 그러기에 저는 '옷'으로 심심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탈춤 의상은 밖에서 보면 검정색인데 안감에서 형형한 색상이 보이도록 연출했고 가발처럼 보이는 헤드피스도 안감과 색을 맞췄어요. 탈은 없지만 탈의 원형이 매우 화려하단 점에 착안해 디자인한 것입니다."
서영희의 의상 덕분에 국립무용단은 보그코리아와 처음으로 화보 협력도 진행했다. SNS에 올라온 보그코리아의 화보는 "역대급으로 힙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전례없는 리트윗(RT) 수를 기록했다. 서영희는 "'미인' 무대에서 창작진의 취향이 조화롭고 다채롭게 펼쳐질 것"이라며 "무대 연출과 제 의상이 어떤 시너지를 낼지 저 역시 궁금하다"고 말했다.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