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사장 지내고 양조 도전한 윤경림
메밀·찹쌀 AI로 배합해 장인이 감수
30년산 풍미 내려 작은 오크통 숙성
“30년산 위스키를 만들려면 꼭 30년을 기다려야 할까.”
윤경림 에이투디투(A2D2) 대표의 한국형 위스키 실험은 이 질문에서 출발했다. 오랜 시간이 위스키의 깊은 풍미를 만든다면 그 시간을 줄일 방법은 없을까. 오크통 크기를 줄이고 온도와 습도를 달리하면 숙성 속도를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비교 기준으로 삼은 것은 약 500ℓ 크기 오크통에 원액을 30년간 숙성하는 스코틀랜드의 전통 방식이었다. 그는 “오크통을 5ℓ로 줄이면 원액이 나무와 맞닿는 비율이 커져 숙성이 5배 이상 빨라지고 온도와 습도까지 높이면 속도를 25배 이상 끌어올려 2년 정도면 30년산에 가까운 풍미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KT 사장 출신인 윤 대표는 초고속 인터넷망 구축과 인터넷TV(IPTV) 도입 등 국내 통신업계 혁신을 이끈 인물이다. 변화의 방향을 남보다 먼저 읽고 가능성을 실제 사업으로 옮기는 데 남다른 감각을 보여왔다. 1998년 대부분 가정이 모뎀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던 시절, 그는 메가 단위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의 가능성을 제안했다. 2024년 11월에는 법률테크 기업 A2D2를 설립하고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인공지능(AI)과 함께 빚은 한국형 위스키
윤 대표가 최근 펴낸 신간 ‘위스키에 질문하다’에는 한국형 위스키를 구상하고 실제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담겼다. 그는 한국 위스키 하면 아직 뚜렷하게 떠오르는 브랜드가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미국·일본 위스키가 저마다 지역성과 서사를 갖고 있듯 한국의 재료와 정서로도 새로운 위스키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에서 AI가 단순한 검색 도구가 아니라 ‘양조 파트너’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윤 대표는 AI에 한국형 위스키를 만든다면 무엇이 달라야 하는지 물었다. AI는 한국형 위스키의 뼈대로 ‘한·흥·절제’라는 세 단어를 제안했다.
‘한’은 메밀로 풀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자라는 메밀의 이미지와 쌉쌀한 맛이 한국적 한의 정서와 닿아 있다는 설명이었다. ‘흥’은 찹쌀이었다. 잔칫날 떡을 떠올리게 하는 곡물인 데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사람을 들뜨게 한다는 이유에서다. ‘절제’는 귀리로 잡았다. 지나치게 흐트러지지 않도록 맛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이었다.
여기에 보리와 수수도 더했다. 보리는 스코틀랜드 위스키의 전통을, 수수는 중국 바이주의 동양적 증류 문화를 상징한다. 윤 대표는 “글로벌 위스키라는 형식 위에 한국적 정서를 얹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이디어는 실제 실험으로 이어졌다. 곡물을 고르고 발효시킨 뒤 증류해 오크통에 넣었다. AI가 제안한 배합은 위스키 장인의 검토도 거쳤다. 장인은 일부 비율을 조정하면서도 “그럴듯하다”고 평가했다. 화면 속 프롬프트가 실제 증류기로 옮겨간 셈이다.
책을 쓰는 방식도 비슷했다. 방향과 구성은 사람이 잡고, 문장과 표현에는 AI의 도움을 받았다. 윤 대표는 AI를 답을 대신 내리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이 가진 질문을 확장해주는 도구라고 말했다. 그는 “AI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끌어와도 결국 무엇을 물을지, 어떤 답을 현실로 옮길지는 사람이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 수만 장 재판 기록도 디지털화
윤 대표의 본업은 AI 기반 리걸테크다. 그가 이끄는 A2D2는 ‘AI로 아날로그 데이터를 디지털화한다’란 뜻을 담은 회사다. 대표 서비스 ‘아이렉스(AiLex)’는 재판 과정에서 발생하는 방대한 법률 문서를 AI로 디지털화하고 사건의 핵심 내용과 인물 관계, 진술 흐름 등을 요약·분석해 제공한다. 현재 약 400개 로펌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600건가량의 사건에 활용됐다.
윤 대표는 “재판 과정에서는 서류와 판결문, 증거 자료가 수만 페이지씩 쌓이지만 이를 일일이 분류하고 핵심 내용을 파악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며 “‘왜 이 방대한 아날로그 데이터를 정리하고 분석해주는 서비스가 없을까’란 질문에서 창업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AI가 법률 서비스의 비용과 정보 격차를 줄일 수 있다고 본다. 사건 기록을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변호 업무 효율이 높아지고 비용 부담도 낮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윤 대표는 “AI로 법률 서비스를 효율화하면 돈 없고 힘없는 사람도 보다 대등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날로그 농업을 데이터 산업으로
윤 대표는 스마트팜 실험도 준비하고 있다. 농사의 경험과 감각에 의존해온 영역을 데이터로 바꾸겠다는 구상이다. 온도와 습도, 토양 상태, 작물 생육 정보 등을 수치화하고 AI로 분석하면 농업을 보다 예측 가능한 산업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젊은 세대가 지역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윤 대표의 구상이다.
그는 “위스키와 법률, 농업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접근법은 같다”며 “AI로 기존 산업의 불편을 줄이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 수 있는지 묻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윤 대표는 직장인들에게 “더 늦기 전에 자기만의 것을 만들어보는 취미를 가지라”고 조언했다. 36년간 조직생활을 했다는 그는 “우리 세대는 워라밸 없이 살았다. 은퇴하고 나면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며 “무엇을 소비하는 취미가 아니라 직접 만들어보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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