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리 한국체육대 교수(37)는 늦게 핀 꽃이었다.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20대 초중반까지 좀처럼 빛을 발하지 못했다. 모든 아마추어 선수들의 꿈이라는 올림픽 무대도 20대 후반이 돼서야 처음 밟았다.
스무 살이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는 황경선이라는 큰 산이 버티고 있었다. 2년 선배인 황경선은 2004 아테네 올림픽 동메달을 시작으로 2008년 베이징과 2012년 런던에서는 2회 연속 금메달을 목에 건 당대의 최강자였다. 오혜리는 2012년 런던 대회 때는 국가대표 선발전 직전 허벅지 근육이 찢어지는 바람에 시작도 하기 전에 꿈을 접어야 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은 그에게는 삼세 번째 도전이었다. 그리고 여자 67kg급으로 출전한 그 대회에서 그토록 기다렸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28세로 역대 한국 태권도 선수 최고령 금메달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금메달을 따고도 그는 울지 않았다.
오혜리는 “준비했던 걸 다 쏟아부은 대회였다. 결승까지 4경기를 했는데 준비한 대로 잘 뛰었다. 세리머니도 마음먹은 대로 했다”며 “워낙 준비한 게 많다 보니 이전에 각종 국제대회를 뛸 때보다 훨씬 편안했다. 결승을 마치고 나서도 ‘한 판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며 웃었다.
그랬던 그가 지난해 파리올림픽에 코치로 나가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는 지난해 파리올림픽 태권도 남자 80kg에 출전한 서건우(22)의 전담 코치였다. 대회 내내 그는 태권도 경기장의 ‘신스틸러’였다. 16강전에서 심판의 오심으로 서건우가 패배 위기에 몰리자 그는 경기장 위로 뛰어 올라가 판정 번복을 이끌어냈다. 서건우가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을 때는 머리를 쓰다듬었고, 4강에서 패해 메달 획득에 실패했을 때는 눈물을 흘렸다. 때론 호랑이 같고, 때론 엄마 같은 모습에 많은 이들을 그를 ‘걸크러시’라고 불렀다. 서건우가 3, 4위전에 패했을 때 그는 “함께 운동했던 게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울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함과 후회가 가득했다”라고 했다.
오혜리는 자신을 ‘독사 코치’라고 했다. 한국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단은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새벽, 오전, 오후에 이어 야간 등 하루 네 차례 훈련을 했다. 오혜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선수들을 다그쳤다. 다른 중량급 선수들에 비해 체격 조건이 떨어지는 서건우는 더 강하게 몰아쳤다. 서건우는 모든 훈련을 묵묵히 버텨낸 몇 안 되는 선수였다. 그는 “정말 강하고 모질게 대했다. 그런데 건우는 그 힘든 훈련이 끝난 후에도 30분 더 봐달라고 하더라”며 “파리올림픽에 ‘올인’이라는 걸 했다. 힘들게 준비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가 그렇게 나오지 않았다. 허탈함과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컸다”고 말했다.
태권도 대표팀 훈련의 하이라이트는 매주 월요일 오전 실시하는 ‘서킷 훈련’이다. 수십 kg짜리 원반을 이용한 근력 운동을 1분간 한 후 전속력으로 2분을 달리는 게 한 세트다. 이걸 3세트 하면 시간은 9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효과는 엄청나다. 오혜리는 “처음엔 땀이 엄청나게 흐르다가 어느 순간 땀이 멈춘다. 어지럽고 머리엔 쥐가 난다”고 했다. 이후 곧바로 사이클로 이동해 15초간 전력 질주-45초 휴식을 10회 반복한다. 모두 합해 30분도 채 되지 않지만 근력과 심폐 지구력을 키우는 데는 그만이다.
그가 제자들에게 ‘독사 코치’를 자임하는 건 이유가 있다. 오혜리 자신이 이 같은 지옥 훈련을 이겨낸 효과를 톡톡히 봤기 때문이다.
키가 180cm인 오혜리는 큰 키와 유연성 등 신체조건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운동 신경은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태권도를 처음 시작한 초등학교 시절과 중학교 시절 그가 발차기나 동작 등 시범을 보이면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하곤 했다. 선수다운 좋은 자세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엉성한 발차기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당시 재능이 그리 좋지 않으니 노력을 많이 해야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며 “처음 동작을 배워도 그대로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남들이 한두 번에 할 걸 나는 세네 번 해야 했다. 노력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기본 체력도 약했다. 달리기를 하면 거의 꼴찌였다. 그런 그를 지금의 오혜리로 만든 건 한국체육대에 입학해서 만난 ‘독사 같은’ 정광채 교수였다. 오혜리는 “정광채 교수님에게서 진짜 독하게 배웠다. 선수 때는 어떻게 저렇게 독하게 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과정을 이겨내니 정말 ‘저질 체력’이었던 나도 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정 교수는 2016년 리우 올림픽 때는 대표팀 코치로 역시 한국체대 출신으로 여자 49kg급에서 금메달을 딴 김소희를 지도했다. 태릉선수촌에서 같은 방을 썼던 오혜리와 김소희는 리우 올림픽에서도 룸메이트였다. 둘은 나란히 금메달을 목에 걸고 귀국했다. 오혜리는 “지옥 훈련을 통해 체력이 좋아지니 기술도 따라서 좋아졌다. 내가 해봐서 안다. 꾸준함을 이길 수 있는 건 없다. 나는 뒤늦게 성공했지만 제자들은 하루빨리 성공을 맛봤으면 하면 마음에 더 독하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의 지도 방식은 ‘워라밸’이나 ‘효율적인 훈련’ 등을 추구하는 ‘MZ세대’와의 맞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도 그는 단호했다. 오혜리는 “주변에서는 소통을 잘하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한국체대에 입학하고, 올림픽 금메달을 바라는 선수가 있다면 그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는 게 좋은 선생님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옥 훈련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올림픽 메달을 따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했던 경험은 향후 인생을 사는데도 어떻게든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혜리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뭔가를 하면서 살았다. 올림픽 금메달을 딴 이듬해 그는 차의과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선수 시절 발목 부상에 시달리곤 했던 그는 트레이닝 쪽에 관심이 많았는데 평소 마음먹고 있던 바를 바로 실행에 옮겼다.
당시 춘천시청 선수였던 그는 주중에는 훈련을 하고, 주말엔 경기도 분당에 있는 학교에 와서 공부를 했다. 그렇게 불과 2년 반만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2021년 모교 한국체대 교수로 부임했다. 여기에는 같은 태권도 선수 출신으로 단국대 국제스포츠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는 남편 전민수 교수의 도움도 컸다. 한국체대 1년 선후배 사이인 둘은 13년 연애 끝에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는 “태권도 후배들을 생각하면 내가 길을 잘 닦아놔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며 “정말 고생하면서 운동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좋은 선례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파리올림픽 후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는 내달 열리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선수 지도에 열심이다. 오전, 오후, 야간 운동을 하고 주말에도 한 타임씩 훈련을 한다. 주5일 시대에 그는 주7일 훈련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오혜리는 “선수촌에 비해 그마나 새벽 훈련은 없다. 야간 훈련도 일주일에 두 번밖에 하지 않는다”며 “올림픽을 위해서 4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데 4년이 한 번에 내 눈앞에 오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1년씩 쌓여서 오는 것이다. 그렇게 꾸준히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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